마음의 울림/음악 이야기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
팡씨1
2008. 4. 15. 18:24

** 1876년의 베르디 1830년 봄, 바렛치의 아내 마리아 데마르데는 그녀의 큰 딸 마르게리타가 베르디와 사랑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베르디는 17세의 어린 소년이긴 했지만 이미 음악적인 재질을 인정받고 있는 터라 마르게리타의 피아노 선생 자격으로 늘 그녀 곁에 있게 됐고, 자연스럽게 둘의 사이가 사랑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마르게리타는 베르디보다 7개월 어린 동갑 나기였다. 그녀는 붓세토 마을 제일의 미인으로 소문이 날 만큼 빼어난 미모였고 머리도 총명해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베르디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는 동안 비록 상대의 출신이 자기보다 낮기는 했지만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 남편 바렛치가 븟세토 제일의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만심을 갖고 있었고, 게다가 장래가 불확실한 베르디를 사윗감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둘 사이를 떼어놓을 궁리를 하게 된다. 마리아는 남편을 조정해서 베르디의 부모를 설득하는 한편, 장학금 신청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자네는 앞길이 밝은 청년이니 븟세토 같은 작은 고을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우리가 다 손을 써 놓았으니 음악의 도시 밀라노로 가게나”라는 명분을 세울 수가 있었다. 사랑의 열병에 빠져있는 베르디에겐 청천 벽력같은 제안이었지만 그러나 이미 어른들이 다 만들어 놓은 각본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1831년 6월 초, 베르디는 아버지와 스승 프로베지를 동반해서 밀라노를 향해 떠났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전송했지만 마르게리타는 눈물도 흘릴 수가 없었다. 베르디는 그녀를 ‘기타’라는 애칭으로 늘 불렀지만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 이 작별에서도 마리아의 따가운 감시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밀라노에 도착한 베르디는 밀라노 음악원 입학을 위한 오디션을 받았지만 학교가 정한 입학연령이 초과된 데다 “음악원에 들어와 공부하는 것보다는 개인 지도를 받는 것이 더 좋겠다”는 권유를 받고 그 길로 음악원에서 작곡, 피아노, 청음을 가르치고 있었던 명교수 빈센쪼 라비나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음악적 진보는 놀라울 정도여서 교수도 늘 감탄하고 더욱 성의를 다해 지도했다. 1833년 6월,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해 주고 동시에 그에게 최초로 음악을 가르쳐 준 븟세토의 은사 프로베지가 운명했다는 비보가 날아 왔다. 프로베지는 븟세토 음악협회의 책임자와 대성당의 합창장, 교향악단의 지휘자 등을 맡고 있다가 별세했기 때문에 븟세토에서는 당장 그 후임자 물색에 나섰다. 이미 프로베지는 유언으로 자기 후임자로 베르디를 추천했고 음악협회도 뜻을 함께 하여 이를 적극 추진했지만, 바르나니 주교(主敎)는 프로베지의 진보적 음악 성향에 반감을 갖고 있는 터에, 베르디가 밀라노에서 교회음악보다는 세속음악을 더 가까이 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반니 페르라리라는 인물에게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와 합창장 자리를 주고 뒤 이어 오케스트라의 지휘도 맡길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음악협회와 관현악단에서 이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836년 1월 23일, 븟세토 시장은 “상부 명령에 의해 궁정 오르가니스트 지우젭페 아리노비의 심사로 경연이 거행된다”는 공고를 내게 된다. 븟세토 시의 주요 음악 책임자의 자리를 후보자들의 경연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경연은 2월 27일 파르마에서 열렸다. 주교가 강력하게 밀고 있었던 페르라리는 지레 겁을 먹고 사퇴 하고 말았다. 입장이 난처해진 주교는 롯시라는 인물을 대신 경연에 내세웠다. 경연은 피아노 연주와 심사관인 아리노비가 출제한 주제에 따라 푸가(Fugue)를 작곡하는 내용으로 진행됐다. 롯시는 베르디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심사관 아리노비는 베르디의 승리를 선언했고, 며칠 뒤 그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3월 14일, 베르디는 븟세토 시 음악감독에 취임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23살의 음악감독이 탄생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베르디를 후원했는데 그 중에서도 그를 기쁘게 한 인물은 마르가리테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6년 전, 그를 딸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온갖 방해를 다 했던 마리아가 지금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베르디의 후원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녀의 지원은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마르가리테와의 결혼 성사에까지 미쳤다. 마르가리테와 베르디는 1836년 5월 4일 결혼식을 올렸다. 마르가리테는 ‘황금처럼 아름다운 신부’라는 찬사를 받았다. 둘의 보금자리는 장인이 마련해 준 대저택에 마련됐다. 베르디의 음악적 야심은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는 데 있었다. 학업시절에 관현악곡, 가곡 등을 습작으로 써 왔던 그는 결혼 후 생활에 안정이 오게 되자 오페라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이미 라비나 교수 문하 시절에 쓰기 시작했었던 <로체스텔>(대본/안토니오 피아차)을 서둘러 완성했다. 그런 뒤 장인을 만나 장래 계획을 설명하고 후일 꼭 갚기로 하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밀라노로 갔다. 오페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밀라노 진출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낱 이름 없는 젊은 작곡가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는 인물이 있을 리 없었다. 특히, 당시 스칼라 가극장의 지배인 메렐리는 베르디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었던 몇몇 음악가들로부터 베르디의 신작 오페라를 추천 받았지만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차에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프리마 돈나 지우젭피나 스트렙포니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 무렵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어떻게든 오페라를 상연하고 싶어하는 베르디의 모습을 지켜 본 오페라 전문가 맛시니와 밀라노 음악원의 메리기 교수가 밀라노 피오 자선협회의 후원을 받아 1839년에 베르디의 오페라로 자선 공연을 갖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고, 이 공연에 메렐리와 지우젭피나가 협력하도록 일을 만들어 놓았다. 베르디의 기쁨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이 일로 지우젭피나가 베르디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은 훗날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는 인연이 된다. 지우젭피나 스트렙포니는 베르디보다 2년 늦은 1815년에 밀라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몰짜 태생이다. 아버지가 오페라 작곡가이자 연출자여서 어렸을 때부터 성악 훈련을 받았고,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뒤 오레라 가수로 데뷔하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인이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주 매력적인 모습이었고 자그마한 키에 온화한 성격의 여인이었다. 드디어 연습은 시작됐다. 지우젭피나가 출연을 결심하게 되자 당시 최고의 테너 나폴레옹 모리아니, 바리톤 지오르지오 론코니, 명 베이스 마리니도 출연에 동의했다. 당시 오페라계의 최고 가수들이 총동원된 셈이다. 베르디의 흥분과 기쁨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 모리아니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져 공연은 취소되었다. 큰 좌절에 빠진 베르디는 더 이상 밀라노에서 버틸 힘이 없었다. 밀라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평소 친분을 맺고 있었던 출판업자 리코르디를 찾아갔다. 진심 어린 위로를 하는 리코르디에게 베르디는 내뱉듯 말했다. “앞으로 두고 보세요. 스칼라가 내게 작곡을 부탁하는 날이 있을 겁니다”. 베르디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지우젭피나는 메델리를 집요하게 설득한다. 그 결과 가을 시즌에 베르디의 오페라를 라 스칼라에서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재도전의 다부진 각오를 갖고 다시 밀라노에 온 그는 신작 오페라 <오베르토>를 다시 손질하고 곧 연습에 들어갔다. 그 동안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가 모두 세상을 떠나는 등 어려움을 당하지만 오페라가 그를 위로했다.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는 1839년 11월 17일에 스칼라에서 초연 됐다. 이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계속 14번이나 상연됐다. 고향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베르디의 성공을 지켜보았고, 첫날 제1막이 끝나고 청중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내자 너무도 감격에 벅찬 베르디는 집에서 초조하게 상연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 마르가리테에게 달려갔다. 두 자녀를 잃고서도 오직 남편의 성공을 고대했던 아내의 기쁨 역시 눈물로 표현됐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 그 누구도 차마 짐작할 수 없었던 비극이 하필이면 남편의 성공 직후에 갑자기 그녀를 찾아온다. 오베르토의 눈부신 성공으로 자신을 얻은 메렐리 지배인은 베르디에게 신작 오페라 3곡을 위촉하고 이들 작품을 라 스칼라와 빈(Wien) 제실(帝室) 가극장에서 상연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제의했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천덕꾸러기 작곡가에서 일약 저명한 인물로 변신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리코르디가 2천 오스트리아 리라를 지불하고 <오베르토>의 출판권을 사 들이는 물질적 대접도 처음으로 받게 됐다.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베르디 앞에 불쑥 찾아온다. 충일한 기쁨과 보람으로 1839년 겨울을 지내고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이 찾아 왔을 때 아내가 대수롭지 않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됐다. 아내도 베르디도 이 와병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르게리타는 병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달려왔지만 딸의 임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6월 18일, 27세의 젊은 아내는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났다. “불과 2년 동안에 나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비참한 상태 속에서 내가 써야 할 것이 코믹 오페라라니 이게 무슨 야속한 신의 조화일까요.” 베르디는 통곡했다. 메렐리는 베르디가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은 다시 작곡에 열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지난해에 서명한 계약을 들먹이면서 새 오페라에 착수할 것을 독촉했다. 베르디가 쉽게 움직이질 않자 8월에 신작이 상연된다는 발표를 일방적으로 신문에 터뜨렸다. 이렇게 해서 <하루만의 임금님>이 그해 9월 5일에 스칼라 극장에서 상연됐다. 출연자들도 모두 당대 일류급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첫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고 메렐리는 이 작품 상연을 그것으로 끝내버렸다. 작품의 이름처럼 상연도 하루로 그치고 말았다. 베르디의 실의는 좀처럼 회생될 줄 몰랐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지우젭피나 스트렙포니의 따뜻한 위로와 보호였다. 1840년 11월, 베르디는 아내와 아이들의 유품을 고향의 장인에게 모두 보내고 밀라노에 방을 하나 얻어 이사했다. 때마침 크리스토폴리에 갈레리아가 새로 생겨 이따금 그곳에 나가 산책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곳엔 밀라노의 이름난 예술인들이 늘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어느 날. 눈이 몹시 내렸고 베르디는 눈을 맞으며 산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메렐리가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착상하고 솔레라가 대본을 만든 새 오페라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영웅 네부갓네살 왕을 소재로 삼은 <나부코>에 관한 것이었다. 이 대본으로 오페라를 쓰라고 그는 또 계약 얘기를 꺼냈다.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하는 베르디의 양복 주머니에 대본을 쑤셔 넣고 메렐리는 돌아갔다. “내 마음은 슬픔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책상 위에 솔레라의 대본을 내던진 채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의 시선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대본에 닿게 됐다. 그때 대본 속의 한 구절이 내 눈을 번쩍 뜨게 했다. <가거라. 나의 상념(想念)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이 한 줄의 글은 내 마음을 울리고, 이 대본에 어느덧 말려들고 말았다. 한 장 또 한 장 읽어나가는 동안 다시는 작품을 쓰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던 결심과 샘솟듯 솟아오르는 악상의 갈등이 괴로워 대본을 덮고 누워 버렸다. 그러나 나부코에 의해서 떠오른 악상은 나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일어나 한 번, 두 번 읽고 또 읽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날이 밝아 새벽이 되었다. 그날 오후에 나는 대본을 되돌려줄 생각으로 메렐리를 찾아갔다....(중략) 이제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나부코의 대본을 주머니에 넣은 채 집에 돌아와 한 구절, 그리고 다음날 또 한 구절 이렇게 서서히 쓰기 시작한 것이다.” 베르디는 나부코를 쓰면서 아바가일 역에 지우젭피나를 염두에 두었다. 1841년 10월에 작곡이 끝났다. 그는 나부코가 12월 사육제 시즌에 상연되길 희망했지만 메렐리의 사정 때문에 이듬해 3월로 미루어졌다. 2월말에 연습이 시작됐다. 지우젭피나를 비롯해서 당시 최고의 바리톤 론코니 등이 출연을 하게 됐다. A.파긴은 <수많은 회상>에서 이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연습을 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이 새로운 작품에 매혹되어 버렸다. 극장의 종업원들마저도 커다란 흥분을 일으켜서 연습 무대로 몰려들고 이 소문은 당장 밀라노 전체에 퍼져 나갔다.” 3월 9일에 라 스칼라 극장에서 <나부코>는 초연 됐고 청중은 열광했다. 신문은 특히 합창에 매료되어서 베르디를 ‘합창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그 자신도 “나부코는 행운의 별 아래 탄생했다.”고 흐뭇해했다. 메렐리는 다음 해 여름 시즌에 이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려 무려 57회나 상연하여 스칼라 극장의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베르디의 생활은 매우 분주한 것이 됐다. 나부코가 성공하자 도처의 오페라 극장에서 신작 오페라 작곡 의뢰가 쇄도했고 <제1회 십자군의 롬바르디아人>, <에르나니> 같은 애국적인 내용의 오페라가 청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켜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뒤를 이어 <지오반나 다르코> <앗틸라> <멕베스>를 발표했고, 런던에서는 여왕이 국회의 개원과 외국 여행을 연기하면서까지 그의 최초의 런던 공연 작품인 <군도(群盜)>를 직접 참관하는 융숭한 대접을 받는 영광의 세월을 쌓아 갔다. 1841년 3월, 나부코 공연의 성공 후 6년이 흐른 뒤인 1847년 파리, 그곳엔 베르디의 생애에 또 한 번의 운명을 바꿔 놓을 인물이 살고 있었다. 나부코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던 프리마돈나 지우젭피나 스트렙포니는 그 무렵 파리에 살고 있었다. 무대를 떠나 성악 교사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이국 땅에서 과거의 은인이기도 했던 지우젭피나를 만나게 된 베르디의 마음은 오래간만에 환히 밝아졌다. 베르디를 만난 그녀의 마음도 같은 색도를 가졌다. 두 사람의 영혼은 일찍이 경험 하지 못한 희열과 동경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둘의 관계는 사랑으로 이행되고 파리는 그래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게 됐다. 프리마 돈나로서 명성을 떨치던 지우젭피나가 오페라 무대를 떠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1845년 12월 26일, 모데나 가극장에서 <제1회 십자군의 롬바르디아人>에서 그녀가 주역을 맡아 공연하고 있을 때 당시 극장 지배인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일단의 훼방꾼들이 야유를 심하게 던지자 공연이 끝나기 전에 극장을 나갔던 지배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거리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공연이 엉망진창이 됐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다음 시즌에서 다시 롬바르디아人이 상연될 예정이었는데 웬일인지 그녀의 이름이 삭제되어 있었다. 이 일이 그녀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어 아예 오페라 무대에서 떠날 결심을 하게 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르디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우젭피나에게 청혼했다. 그녀는 기쁘게 이에 응했다. 그녀는 베르디의 아내가 되는 동시에 가수의 역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음악사회에서 떠남으로서 내 마음은 매우 평온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젠 허식에서도 해방되었고 동료 가수들의 반목도 없습니다“라고 그녀는 기뻐했다. 베르디는 34세, 지우젭피나는 32세 였다. 이후 베르디는 파리 상류층 주택가에서 아내의 애정 어린 도움을 받으며 오랜만의 평화를 느끼며 다시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약 3년 뒤, 베르디는 고향 붓세토에 새 저택 오를란디 빌라를 짓고 아내를 파리에서 데려왔다. 2천명 정도가 살고 있는 이 조그마한 고장에서 지우젭피나는 금방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더군다나 베르디가 붓세토의 터줏대감인 바렛티의 사위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은 더욱 그녀에게 쏠렸다. 그 눈길들은 환영의 따뜻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든 그녀를 따돌리려는 차가운 것이었다. 교회에서조차 그녀는 늘 혼자 앉아 있어야 했다. 젭피나(지우젭피나의 애칭)에 대한 주민들의 냉대는 베르디에게도 같은 강도를 나타냈다. 더군다나 베르디와 젭피나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내연관계로 머물러 있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노골적으로 적대 감정을 나타내곤 했다. 베르디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장인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는 심리와 죽은 아내와 두 딸에 대해서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디의 오랜 친구였던 소마리아 백작 부인도 “이런 체통 사나운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며 떠나 버릴 지경이었다. 주위의 이런 냉대 때문에 한때 두 사람은 파리에서 다시 생활한 일도 있었다. 젭피나는 베네치아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관람한 뒤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내연의 처로 머물고 있는 처지가 비올레타의 극중 상황과 너무 흡사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1853년, 2월, 두 사람은 산 아가타 농원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이제는 주변의 눈치 같은 것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비로소 둘은 평화를 완벽하게 찾았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베르디는 창작에, 젭피나는 내조에 최선을 다 했다. 젭피나는 마치 남편의 분신처럼 어디에나 함께 있었다. 그러나 베르디의 마음속엔 함께 살아온 지 12년이나 된 아내에게 정식 결혼의 기쁨을 주지 못한 것이 짐이 되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1859년 8월 29일 조그마한 교회에서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엔 그들을 태워준 마부와 교회의 종치기만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한편, 베르디가 창작 작업을 왕성하게 진행시키던 무렵은 이탈리아 전국이 오스트리아를 대항해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이를 의식하여 ‘나부코’ ‘에르나니’ ‘예루살렘’ ‘가면무도회’ 등 일련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들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됐고 급기야는 베르디를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삼게끔 되었다. 이런 경력이 후일 이탈리아가 독립을 하고 첫 의회가 결성됐을 때 베르디를 국회에 진출시켰고, 그는 문화정책을 적극 권유하여 밀라노, 로마, 나폴리의 가극장에 정부의 재정을 보조하도록 하는 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871년 12월 24일 <아이다>의 초연을 끝낸 뒤 거처를 제노바로 옮겼다. 이때부터 베르디 부부는 겨울엔 제노바에서 나머지 계절엔 산 아가타에서 사는 풍요로움을 즐겼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풍요도 1897년 11월 14일엔 끝이 나고 말았다. 지우젭피나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꽃이나 참례자 없이 간소하게 묻어 주세요”라는 유언에 따라 붓세토 대성당에서 간소하게 장례식이 치러지고 밀라노에 묻혔다. 젭피나는 운명하기 전 “그럼 떠나갑니다. 나의 베르디님. 살아 있을 때 맺어진 것처럼 천국에서도 우리들을 신께서 맺어 주시길”이라고 작별 인사를 남겼다. 베르디는 이때부터 거의 은둔의 생활로 일관했다. 이따금 피아노 앞에 앉아 죽은 아내를 생각하는 노래를 읊조리곤 했다. 1901년 1월 21일 아침. 주치의 카포라리 박사가 어느 때처럼 진찰을 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10시 30분 경, 양복을 입기 위해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 소문은 금방 밀라노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숙소 앞에 모여들었다. 의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1월 27일 상오 2시 50분.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르디는 운명했다. 다음해 2월 28일. 베르디 부처의 유해는 묘지를 떠나 ‘음악가 휴식의 집’의 새로 지은 교회에 묻혔다. 이때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8천명의 합창단이 나부코의 합창곡 “가거라 나의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를 노래했다. 그의 영혼은 이로써 금빛 날개 위에 젭피나를 동반하여 천국으로 오를 수 있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따라서 극과 음악의 통일적 표현에 유의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창의 가창성을 강조하고, 이에 못지않게 중창에 각별한 무게를 두어 극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또한 관현악의 단호하고도 강렬한 표현을 통해서 연극적인 참여강도를 현저하게 높이고 있는 것도 베르디 오페라의 두드러진 개성이다. 한편, 베르디의 오페라가 주로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특히 바리톤 중심) 전개된 것은 그의 대부분의 오페라들이 부자지간, 부녀지간, 또는 형제지간의 비극에서 빚어지는 그만의 개성적인 캐릭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오페라 목록을 살펴보면 초기와 만년의 아주 드문 희극적 작품들 몇 곡을 제외하면 태반이 비극적 소재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언제 들어도 변함없이 멜로디의 넘치는 광맥과 같은 존재이다. 그만큼 그의 오페라에서 흐르는 선율들은 그 어떤 작곡가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지극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들이 아닌가! 베르디의 오페라들, 특히 ‘리골레토’는 카바티나와 카발레타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리골레토의 저 무섭고도 어두운 독백은 일찍이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들려주는 대목이다. 게다가 리골레토 최후의 막 전체는 ‘성격표현의 가장 극단적인 예’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공작이 노래하는 우아하고 경쾌한 칸조네와 4명의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른 자기만의 상황을 노래하는데 소름이 돋을 만큼 그 대비가 기가 막히고, 장대한 4중창과 폭풍우를 닮은 어두운 오케스트라의 공포는 베르디의 오페라 예술이 이룩한 가장 극적인 부분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이다>에서 들려주는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완벽한 음량적 균형도 베르디가 성취한 위대한 음악적 진보로 평가된다. 아이다의 수많은 장면들 가운데서도 라다메스의 성별 장면에서 동양의 순수한 멜로디 2개를 교묘하게 다루고 있는데, 많은 평론가들은 이 부분이 아이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런가하면 제4막, 실내에서 들려오는 사교들의 엄숙한 노래와 입구에 선 암네리스의 애절한 슬픔의 대조는 또 얼마나 놀랄만한 효과를 내고 있는가? 베르디는 <오텔로>에 와서 마침내 인습의 속박에서 거의 완전하게 벗어나고 있다. 오텔로 전편은 전통의 굴레를 거의 느끼지 않게 한다. 그러면서도 멜로디의 끝간 데 없는 흐름은 여전히 참신하고 풍부해서 이 작품이 이탈리아 사람의 오페라임을 실감하게 한다. 형식은 전통의 틀을 벗어나고 있지만 내용에서는 전통에 대한 짙은 애정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베르디는 바그너와 같이 종래의 시스템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음악의 혁명을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재료를 사용하여 음악의 아름다움과 완성도를 최고의 경지에 끌어올리려는 열망으로 오페라를 썼던 작곡가이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이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