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북경인가 베이징인가? -원음주의의 문제점

팡씨1 2016. 3. 30. 09:45

북경인가 베이징인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은 [한자를 읽을 때 원음주의를 따를 것인가?] 그리고 기록을 할 때 [한글만을 사용할 것이냐 한자와 병행해서 사용할 것이냐]라는 두 가지 문제의 이야기다.


특히 중국 지명과 인명을 현재의 중국어 원음으로 표기할 경우 야기되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우리 한자음으로 읽고 표기해야 할 이유의 타당성을 증명에 보이고 자한다.


문자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소리글자(표음문자)이고 두 번째는 뜻글자(표의 문자)이다. 소리글자는 한글이고 뜻글자는 한자이다. 한글과 한자를 적절하게 병용함으로써 소리글자의 장점과 뜻글자의 장점을 동시에 살려줄 수 있는 우리식 표현이 유리하다.

과거 한글 사랑을 강조한 나머지 한자를 쓰지 않기로 한 국가정책이 시행되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잘 못된 결정였던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근래 한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이지만 이는 최근 중국의 대외 영향력 증대와 경제적 성장으로 한자의 중요성은 사회적 필요성에 의한 인식 일 수도 있다.

저자는 과거 한글학자 최현배 씨의 평판적 현실적 언어 사용 주장에 대해 강한 반발을 하면서 언어는 의미 전달이 목적이지 말소리 전달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지명에 대해서 왜 그렇게 부르는지 이유가 있으면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발동하기 때문에 베이징(소리)은 북경(의미)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한글을 창제하기로 한 세종대왕이 한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겠다. 한글 창제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한자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한글은 우리 것이요 한자는 중국 것이나 의미 문자 한자를 공유한다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다.


저자는 독립, 해방, 광복이라는 표현에 있어서 독립이란 표현 자체도 잘못되었고 해방이란 표현도 잘못되었다고 한다. 독립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한계적 표현으로 반만년 역사의 독자성을 다 무시하게 된다. 역사이래 처음 독립을 표현할 뿐이다. 해방이란 타동사 의미로 일본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다거나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의 타의적 표현이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정확한 표현은 광복 즉 빛을 다시 찾다 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을사보호조약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을사늑약이라 표현해야 할 것이다. 언어 표현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대목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한 [不變應萬變]은 "불변하는 것으로 만 번 변하는 것에 대응하자"라는 뜻으로 광복 이후 신탁 반대해서 순식간에 신탁 찬성으로 돌아서는 변덕스러운 민족성에 대한 충고였다.


재미동포 재일동포 해외동포라고 부르면서 유독 중국 내의 동포에게 만은 조선족이라 부른다. 모순이다. 스스로 폄하하고 있는 못난 민족성. 중국 동북공정 기획의 일환으로 중국인들이 조선족이라 부르는 것을 우리 민족이 그대로 따라 부르고 있다.


우리 한글 학자들이 한자 사용을 폐지하려 했는데 한자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우리 문자이지 결코 제국의 문자로 간주할 이유도 없는데 우리는 광복의 흥분 속에서 엉겁결에 일본에 대한 복수심으로 한자를 제국주의 문자로 간주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한자를 모르면 선조들이 남긴 기록을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자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한글과 한자를 혼용 사용하는데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인데 한학자 한글학자 들은 각자의 밥그릇만을 생각하니 이도 저도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20 세기 초 중국은 본체인 한자 문자가 어렵다며 간체자를 도입했고 일본은 패망 후 로마자를 도입해 한자를 기피 하려 했으며 남북한도 모두 광복 이후 한자를 기피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중국도 일본도 간자체를 만들어 쓰고 있으나 한국만큼은 정자체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제 한자의 본 고장은 한반도 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이상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해온 문자를 자기 나라의 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역사와 문화가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문자는 그것을 사용하는 나라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흡수하여 동화되면 우리 문화가 되는 것이다. 언어인 글과 문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한자는 이미 우리 것인 것이다. 최근 한국 드라마가 한국적인 문화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사실 한류는 문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유행의 속성이 더 강하며 언제 소멸되지 모르는 불완전한 것이다. 문자는 유행과는 다르다.



소리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 변화가 계속되기 때문에 고문을 번역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번역해야만 이해된다. 하지만 뜻글자는 아무리 음운의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글자로 써 놓은 다음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의미가 후대에 그대로 전달된다. 학자가 고문의 원문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사대주의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은 우리 지명 인명을 단 한 경우라도 우리 한글식 발음으로 읽어주지 않는데 우리만 스스로 원음주의를 택하여 꼬박꼬박 후진타오 시진핑 베이징 이렇게 발음하고, 그것도 시청자인 한국인이 알아듯지 못하고 중국인이 알아 듯도록 하기 위한 발음을 하니 도대체 KBS, MBC 등이 우리 방송국인가 중국 방송국인가? 이해할 수가 없다. 원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처참한 사대주의 근간이 된다. 최근 방송에서 중국 관광객을 요우커(그저 소리)라고 발음한다. 옘병 그냥 중국 여행객이다. 遊客(유객)(뜻글자)이다.

원음주의를 주장하면서 한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사대주의를 드러내면서 애국지사 인양 가면 쓴 것과 같다.


대한민국 방송에서 중국 최고 서기를 시진핑이라고 한다. 중국의 방송도 시진핑이라고 한다. 반면 중국 방송에서 박근혜를 박근혜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일본 방송에서 박근혜를 박근혜라 발음하지 않는다. 예전 전두환은 젠또깡 이었다. 모두 한자 사용국 가기 때문에 그들식 발음으로 읽는다. 우리만 사대주의식 원음발음을 한다. 이탈리아 피렌체는 영국에선 플로렌스다 우리도 방송도 시진핑이라 하지 말고 '습근평'이라 하자. 마오쩌둥이 아니라 '모택동'이다. 베이징이 아니라 '북경'이다. 요우커가 아니라 '여행객' '유객'이다.

우리 방송에서 중국인이 알아들을 필요 없다 한국인이 알아들으면 된다. 중국 관광객을 위해 거리 표지판에  '시소우시엔' 이라 써놓는 것 보다 '洗手间' 라고 써 놓아야 되지 않겠나? 거꾸로 내가 중국 여행을 갔을때 '시소시엔'이란 말을 알아 듣고 이해하기 보다 '洗手间' 표지를 보고 감잡는게 빠르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