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이야기

팡씨1 2019. 10. 19. 04:29

임진왜란 발발 직전 1592년 1월~4월 


1. 조선수군의 발전 단계 


개국초 왜구 대책을 위해 강한 수군 유지. 세종 때 수군 5만, 군선 800척으로 대중소 전투선 +무군선 200여 척 포함. 경기 충청도까지 수군절도사를 두었다. 15세기 말까지 강한 수군 유지. 하지만 오랜 평화로 16세기 수군이 줄기 시작했다. 이유는 수군 병역기간이 두배 길고 선상 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기피현상으로 충원 어려워진다. 16세기 중반 일본 왜구의 출몰(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왜변) 증가와 왜구의 배가 대형화하면서 조선수군도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판옥선을 건조하기 시작하고 천. 지. 현. 황자 총통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임진란 발발 30여 년 전 일이다.


조선의 대포 종류와 구조 설명 


대포의 성능 : 태종 세종 때 본격적으로 성능개량하며 사정거리를 늘려왔다. 

천자포의 경우 왜란 때는 사정거리가 철환은 4km 포환은 1.8km에 달했고 현자포의 경우 약 900m에 이르렀다. 당시 조총의 경우 유효 사격 거리가 50m였다. (탄환과 총구의 직진도와 정밀도 5% 오차) 1543년 포르투칼 상인이 일본에 전수했는데 발사 간격은 1분이 소요된다. 조총의 위력은 신립장군이 벌인 탄금대 전투시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판옥선과 왜선의 구조와 비교 


일본 전선 : 층루선(배 위에 누각을 세운 형태 아타케부네(안택선) 수군의 주력선이며  200명 정도 승선. 세키부네(중간 크기 왜 주력선 80명 내외 승선 폭이 좁고 길이가 긴형 충격에 약함. 고바야 (소형 왜선 승선 15명 내외) 


조선 판옥선 : 조선 수군 주력선. 길이 20m 폭 8m 높이 4.4m 배 밑은 다도해에 걸맞은 평편한 구조로 승선 육박전에 능한 왜구를 막기 위해 높은 구조로 개선. 승선 인원은 약160명. 



2. 임진왜란 전 이순신의 준비 사항 (난중일기 기록 중심 내용) 


난중일기 첫 시작 (1592.1.1.) 내용을 아십니까. 남도에서 두 번째 새해를 맞으며 어머니 변씨를 그리워하는 회포를 담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명절 선물로 전라 병마사 최원이 보낸 장전과 편전 즉 무기 견본을 받은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장군의 효성 어린 인간미와 장군으로서 책무에 대한 군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장편전의 위력 


비밀병기 편전과 통아 

장점 : 장전 대비 더 빠른 속도로 날아가 충격량을 높여 관통력을 키운 화살이다. (길이 30cm.) 통아를 이용해 활시위에 얹어 쏘는 방식으로 통아는 약 86cm 길이의 U자형 모양이다. 아군은 적 화살을 주워 다시 쏠 수 있으나 적군은 편전이 짧아 통아 없이는 재 발사가 불가하다. 


2-1. 병력 점검(충원) 


당시 수군 병력 체계 정규군(상.하번군), 별방군(예비군,민방위 매월초 소집 점검 ),별조방군 : 2개월씩 나눠 정기 교대 근무. 

난중일기에 (1월~4월 기록) 매월 초 망궐례 하고 별방군 점검 매월 중순 신구 번 교대 점검. 

당시 군대 병역 기피 및 기록 관리가 엉망이었지만 전라 좌도는 철저히 점검하고 관리했음을 방증하는 내용. 


망궐례 의식(초하루 보름 진남관에서 대궐을 향해 절하는 의식)과 휴무 일자 (임금과 왕비 제삿날) 

2월3일자 일기 내용은 제주도민 탈출자 이야기. (제주를 허락 없이 떠날 수 없었던 제주 백성)


*. 전라도 지역 군관 


전라감사(순찰사) 이광, 병마사 최원, 전라 좌수사 이순신, 전라 우수사 이억기 


5관 5포 내역 지도와 함께 정리 당시 책임관리 또는 수군 이름 포함. 

5관 : 순천(부사 권준 2월 중위장으로 전근), 광양(현감 어영담), 보성(군수 김득광), 흥양(현감 배홍립), 낙안(군수 신호) - 관내 

5포 : 방답(첨사 이순심), 사도(첨사 김완), 발포(권관 나대용 3월 가명), 녹도(만호 정운), 여도(권관 김인영) - 해안포 


2-2. 전함 점검 


주력선 판옥선 유지 보수 및 돌격선인 거북선(귀선) 3척 제작(본영, 방답, 순천) 

판옥선 수량. 수군절도사 4척, 첨사 2척, 만호 2척, 


1월16일 일기에 병선을 수리하지 않은 방답 군관을 곤장 치는 내용 등장. 채석장에서 개에게 피해 준 병사도 곤장 80대를 때렸다. (동물까지 보호 본능) 


거북선의 기원 14세기 초 태조실록에 한강에서 시험운행했다. 세종 때 대마도 정벌시 운영 여부?  이순신은 규모와 구조를 새롭게 제작해 전란 시 돌격선으로 사용하려 미리 제작한다. 2월8일 일기에 첫 거북선을 기록하며 거북선에 쓸 돛용 베를 받았고 4월11일 베로 돛을 제작 3월27일 거북선에서 대포 발사를 시험했다. 4월12일 부산에 왜선이 나타나기 하루 전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현자 지자 대포를 쏘아보았다. 

임진왜란에서 거북선 첫 등장 해전을 아시는지요? 

1592년 5월 29일 이순신 함대 2차 출전 첫 전투인 사천해전입니다. 

거북선의 구조와 형상 기능 설명은 그때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미뤄두겠습니다.


2-3. 순회 점검 (전라좌수사 부임 후 1년 경과 시점 1592. 2.19.~2.27.까지 9일간 5포 중심) 


점검대상 : 전선, 병력, 무기, 성곽, 해자, 훈련상태 


(지도와 함께 이해) 


19일: 순천부사 권준 동생 기생과 대동하여 백야곶 마중. 흥양 여도 만호진에 도착 흥양 현감 배홍립 마중. 여도 만호진 점검 시작 


20일: 오전 여도 점검 오후 이동 중 봄 꽃에 감응하며 (정적인 인물)흥향관아 도착(배홍립) 


21일 : 활쏘기 및 조방장 정걸(전라 좌수사를 역임했던 대선배 노장 80이 넘은 나이)과 회식 


22일 : 흥양 선소 점검 후 녹도 만호진 (정훈 장군)에서 화포 시험 후 회식 


23일: 비가 내렸다. 발포 만호진 도착 점검(과거 이장군이 만호로 있던 곳) 


24일: 또 비. 사량에서 배로 이동 사도에 오후 늦게 도착 사도첨사(김완) 책임 지역을 도중에 점검하다 날이 저물어 중지하고 다음날 다시 


25일: 사도가 가장 허술한 전비태세이므로 첨사를 잡아들여 처벌 후 유숙(순찰사가 얼마 전 잘 준비되었다고 포상 건의했던 사도) 김완은 3월20일 일기에서도 도망친 병역기피자를 찾고 조사하라는 지시사항을 보냈는데 반나절 만에 조사를 끝냈다는 보고에 거짓보고임에 틀림없다며 이순신 장군에게 여러 번 찍혔지만 이후 정신 차리고 정유년 7월5일 칠천량에서 원균이 패해 도망갈 때 끝까지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영웅이다. 


26일: 방답첨사(동명 이순신 태종의 맏아들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 후손 이자 왕실 종친이며 막 부임된 신참) 장전 편전은 부실 하나 전선은 양호 판정 


27일: 방답진 성지 점검 결과 엉성. 오후 좌수영 본영으로 귀가 후 아우 우신과 회식 


3월25일 일기에서 경상병사였던 조대곤이 남해 평산포(전라 좌수영 접경지)까지 왔다가 이순신도 만나지 않고 그냥 간 것에 답답해한다. (수영 간의 불통) 


조정에서 일본 침략을 대비해 준비했던 사항(신립과 이일) 


조정에서 이일은 호서와 호남을, 신립에게는 경기와 황해를 한 달간 돌며 순시 점검하게 했다. 결과는 무기인 활 화살 창 칼만 점검하고 군사 모병과 관리는 허위로 가득 찬 병역 문서로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수박 겉핥기) 신립이 원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해서 두려운 지방 수령 관리들은 백성을 동원하여 마을 길을 닦고 거창하게 마중하는데만 신경 썼다. 이때 조정에서는 신립이 믿을 만하다고 여겼고 신립 자신도 왜놈을 경시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며 장담을 늘어놓으니 조정도 그를 믿고 있었다. 신립이 순회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 후 4/1일 유성룡을 찾아왔길래 물었다. “머지않아 쳐들어오면 당신이 마땅히 선두에 나서게 될 터인데 현재 상황으로 봐서 당신이 생각하기에 방비 상태가 어떻다고 봅니까?”라고 물으니 신립이 대답하기를 “그까지 것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라고 답하기에 다시 유성룡이 “예전에는 왜놈이 칼과 창만 믿고 있지만 지금은 조총도 지니고 있으니 결코 쉬이 봐선 안될 것 같은데요?”라고 재차 묻자 신립이 답하길 “비록 조총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쏠 때마다 맞출 수 있겠소!”라고 답하였다. 그래도 유성룡이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라 군사들이 나태해지고 해이해져 급변이 일어나면 어려울 것이고 얼마간 지나야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으로는 매우 걱정입니다?”라고 말하니 신립은 반성의 기미 없이 그냥 가버렸다 라며 신립을 중국 전국시대 장평 대전의 패장 조나라 조괄(조사 아들) 장군 같다는 비유를 들어 징비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무능한 장수를 뽑으라면 여러분은 누구를 뽑겠습니까?

물론 임진왜란에서 싸우다 전사를 했거나. 병사 또는 실종이 되었으니 나라를 위한 공로는 인정해야겠지요. 당시 선조 임금이 사후 크게 대우해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됐지요. 신립은 사후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 (무모하고 편협된 리더), 이일은 임진란 후 부하 죽이 죄로 압송 중 병사 (기회주의자 리더)합니다. 




2-4. 훈련 점검 


1월15일, 3월15일 난중일기에 군관들에게 활쏘기 시합도 정기적으로 실시했고 포상했으며 당사자 장군도 틈만 나면 활을 쏘았다. 명중률 80%였다 함. 3/5에는 유승룡으로부터 증손 전수 방략이라는 최신 전법서를 받고 밤새 읽고 부하들과도 토론했다 하며 이 전법서에 수륙 화공 전에 대한 설명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