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충주 탄금대 전투
제목: 임란 직후 조정과 육상 전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회 올려드린 영상에서는 / 임진왜란 개전 초 / 육상에서 일본군과 싸운 순변사 이일 장군의 상주 전투 패전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요 / 이번 시간에는 첫 번째 / 충주 탄금대에서 / 조선과 일본군이 육상에서 맞붙어 패하게 된 / 신립 장군이 왜 일방적인 패전을 당했는지 / 두 번째 당시 경상 우수사 원균은 초기 왜란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 두 사건에 대한 세세한 전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유성룡의 징비록과 / 일본에 선교사로 있었던 포르투갈 신부 /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일본사 /그리고 선조실록 등/ 여러 자료를 비교하며/ 시간대 별로 구성하여/ 더 구체적인 사건과 상황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왜란 발발 직후
1. 조선 조정에서 신립 장군의 마음자세와 출정 군관들 이야기
2.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어떻게 하다가 패전하였는지
다음번 영상에서는 / 가까이 다가온 왜군 소식에 한양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하고 선조 임금의 파천 이야기와 이순신 장군님이 첫 출전한 옥포 해전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왜란 발발 후 신립 장군과 출정 군인들
징비록의 기록에서 보면 유성룡은 임금께 군 수뇌부를 개편해야 한다는 장계를 올립니다.
이에 따라 선조는 병조판서에는 홍여순에서 김응남으로 병조 참판은 심충겸을 내정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 차관을 모두 바꾼 거지요. 사실 그래야 병조참판 심충겸은 선조가 평양까지 물러날 때 따라가며 시중든 것 밖에 없지만요.
이번에는 조정 대신들이 국가정보원장의 필요성을 건의하자 이번에는 국무총리 격인 영의정 이산해가 류성룡을 추천하자 그를 제찰사(병부 감독, 정보전략, 작전 기획 등)로 삼고 유성룡은 정보원 부원장으로 다시 김응남을 부제찰사로 건의하여 임명받습니다.
왜군의 파죽지세 상경에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임진왜란 전 서인 정철 측에 섰다는 혐의를 받고 당시 투옥 중이던 김여물을 특별 사면하여 방면한다. 그를 사면한 이유는 김여물이 문신이지만 무략(전쟁 전략 전술가) 가로서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풀려나자마자 바로 용감한 용병 80명을 모으게 된다. 사실 이 김여물은 신립장군과 함께 충주로 내려가면서 충주보다는 조령에 즉 문경 고개에 매복해서 왜군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신립에게 묵살당하고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패전 책임을 지고 투신자살하고 만 인물입니다.
이일 장군이 먼저 상주로 출발하고 나서 유성룡은 신립에게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 물었더니 이 무모한 신립이 말하길 “이일이 얼마 되지 않는 군사를 거느리고 상주로 갔는데 뒤따르는 군대가 없으면 어려울 것이나 혹시 싸움도 모르는 당신 같은 유성룡이 내려가 봐야 도움도 안 될 건데 나 같은 용맹한 사람보고 당장 내려가라고 명하지 않는 거요?”라며 임금께 전해서 나 좀 내려보내 달라고 자만심을 딱 부리는 겁니다. 지난 회 영상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이일 장군은 비겁하고 치졸하다고 평가한다면 지금 보셨듯이 신립 장군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성격인 것 같습니다. 결국 유성룡은 선조에게 전하고 선조는 신립을 삼도 순변사(왕명으로 군사를 지휘하는 특사)로 임명 후 출정을 명합니다.
신립이 궁궐 밖에서 군사를 모집하려 하지만 포악하기로 소문이 났는지 도통 군사가 모집이 안돼요. 마침 신립이 유성룡이 있는 곳에 와보니 그래도 지보다 많은 군사가 모집되어 있으니까 시기심이 발동해서 한다는 말이 “당신 같이 붓들고 끄적거리며 일하는 사람이 모집병을 데리고 내려가 뭐 하겠소 차라릴 나에게 병사를 넘겨주시오”라며 시기심 가득한 소리로 전하니까 유성룡은 자기가 모은 병사들이 신립을 따라가기 싫어하는 눈치를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신립에게 “같은 나라를 살려보자는 취지이니 누가 병력을 인솔 한들 차이 있겠습니까?”라며 순수히 병력과 명단을 신립에게 넘겨준다.(선조 수정 실록에는 한양에서 인수해 내려간 병사가 8000명이라 하는데, 징비록 병사 숫자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징비록에서는 한양에서 내려온 군사가 아니라 대부분 제승방략에 따라 한양에서 장군이 오기를 기다리며 충청도 인근 지역에서 모인 정규군이었던 것 같습니다. 충주 전투에서 8000명이 몰살되었다고 하는 수자와도 일치합니다. ) 사실 이때 이미 신립은 임금에게 김여물도 함께 데려가겠다는 승낙을 받았기 때문에 대안이 없던 김여물은 신립과 함께 가야 되는 것에 약간 껄적지근했다고 합니다. 이런 신립 장군에게 선조는 보검 하나를 주면서 “당신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이 칼로 목을 베라”했다고 합니다. 저 같으면 차라리 “왜구의 우두머리 목을 베어 오라”하며 보검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아무튼 신립이 청사(빈청)로 와서 출병 인사를 하는데 머리에 쓴 사모가 땅에 뚝 떨어지니까 그것을 본 모든 신하 관료들이 꺼림칙한 징조를 느꼈고, 신립이 출정 후 용인 즈음 내려가서 임금에게 소식을 전하는 편지에 자기 서명도 없이 보냈길래 대신들은 “혹시 신립 장군이 출발 전에는 으름장을 놓더니 막상 출정해서는 졸았나”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
*.삼도 순변사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
자 이제는 충주에서의 상황과 탄금대 전투 사항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조선군의 움직임
신립은 서울 한양을 출발해 충주를 지나 문경 조령에서 지키려고 했지만(지도) 이미 상주에서 패한 이일과 조령을 지키던 조방장 변기를 만나 상주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간이 콩알만 해져서 다시 충주로 돌아와 탄금대 남한강변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사실 신립이 조령을 포기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가까이 상주가 있어 왜군이 급자기 나타날까 두려웠고, 둘째는 기마병만 믿고 있던 신립은 협소한 조령보다는 넓고 탁 트인 탄금대가 적격이라고 생각했고, 마지막 세 번째로 고집 불통이며 자만심이 과한 신립의 성격상 부장들과 김여물이 조령에서 방어선을 치고 매복하여 왜군을 공격하자는 제안을 무시했던 겁니다.
탄금대 인근을 전투장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도) 첫째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기마병으로 싸워 왜군에게 기선 제압을 해보겠다. 둘째 급조된 병력으로 왜군을 상대하다 보면 이탈자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여 옛날 중국 한나라 초한대전에서 한신이 조나라 진여를 상대로 정형 전투에서 써먹은 배수진이라는 전략을 흉내 내기로 한 것입니다.
4월 27일 탄금대 전투 하루 전 저녁때입니다. 군관 한 명이 와서 신립에게 왜군이 벌써 조령을 넘었다는 보고를 합니다. 이 소문에 군대가 술렁술렁 하니까 신립이 전투가 벌어진 28일 당일 날 아침 군관을 끌어내 목을 벱니다. 그리고는 임금에게 왜군이 아직 상주에 있다는 뜬금없는 장계를 올립니다. 이일이 상주에서 왜군 근접 소식을 전한 사람을 목벤 것과 같죠? 못난 사람은 하는 짓도 닮는가 봅니다. 사실 이때 왜군은 이미 충주성 인근 4km 떨어진 곳까지 들어왔고 전투를 위해서 세편으로 나눠 일부는 동쪽 산을 돌아 강을 건너 후방으로 이동하고, 또 한편은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역시 조선군의 후방을 노렸고 주력부대는 전방에서 깃발도 내리고 은폐하고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즉 세 방향에서 조선군을 포위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던 거죠.
반면 신립의 배수진 포진을 보면 전방으로 왼쪽은 논과 풀이 많아 기병으로는 공격하기가 땅이 질퍽거려 어려운 지형이었습니다.
아무리 신립이 무모한 사람이라 해도 왜군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한 척후병 하나 안 보냈겠습니까? 보냈죠, 그런데 이 사람이 직책이 충주 목사였는데 정찰을 나갔다가 왜군에게 생포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왜군의 위치를 몰랐다고 하기엔 너무 황당하죠? 저 같으면 척후병을 한 사람만 보내진 않았을 겁니다.
아무 튼 4월 28일 은폐하고 있던 왜군이 세 방향에서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급습을 당한 신립은 기마대를 초승달 모양처럼 펼 처서 전방 주력부대인 왜군을 향해 포위하여 덮치겠다는 작전을 씁니다. 그런데 이때 왜군은 기마대를 쉽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조총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것도 3개 조로 나눠서 약 20초에 한 발씩 집중 사경을 하는 겁니다. 왜군은 기마대에 포위되지 않으려고 일부로 양쪽 끝에서 달려오는 기마대를 향에 집중 사격을 합니다. 여러분 조총 사격에 기병인 사람뿐만 아니라 말이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신립은 두 번의 기마대를 이끌고 달려 나가 봤지만 결국 조선군은 모두 패하고 마지막으로 왜군은 전 병력을 돌격해 장검으로 조선군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여 전 병력 8,000명이 모두 전사합니다. 딱 한 명 이일만 그 사이 산을 끼고돌아 도망가 탈출합니다. 상주에서도 먼저 도망친 이일 생명력 대단하죠?
루이스 프로이스 선교사 기록인 일본사에는 당시 싸움에서 왜군도 조선군의 병력에 상당히 당황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있지만 조선군의 병력이 8만 명이었다고 또다시 뻥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마 신부가 뻥카 쳤다기 보단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왜장 이 그리 전했겠죠? 그리고 조선군의 장교는 용감했던 반면에 그 병사들은 무척 겁쟁이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예로 당시 왜군이 조선군 장수 한 명을 생포했는데 왜군이 살려주겠다고 말하니까며 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며 말이 통하지 않자 손으로 자기 목을 베라는 제스처를 하길래 그대로 목을 베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전투에서 패한 신립은 왜군에게 목 베어 지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자기 누이의 아들이 함께 참전했었는지 몰라도 조카의 머리 끄덩이를 쥐어 잡고 함께 남한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하네요. 죽으려면 자기나 죽지 물귀신도 아니고 젊은 조카까지 물고 늘어지는 신립입니다. 이때 김여물도 함께 목숨을 던졌다고 합니다만 그는 이번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전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그의 가족에게 피난하라고 서신을 띄웠다고 합니다.
이때 충주 일반 백성들은 신립 장군과 이일 장군 두 명이나 있으니 조선군이 승리할 것을 예상해 피난하지 않았다가 일본 왜놈에게 양민까지 모두 학살을 당해 그간의 조선 고을 중 충주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해의 요지인 조령을 지키지 않은 아쉬움인데요 이 내용은 징비록과 선조 수정 실록 그리고 일본 기록인 일본사에서도 공통으로 기록된 내용입니다. (지도, 고모성) 왜군이 상주에서 문경을 들어올 때 조령의 산세를 보고 매복하지 않았을까 싶어 무척 경계하며 넘어오는데 마침 조선군이 하나도 없길래 의아해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며 지났다고 합니다. 나중 참전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다시 왜구를 서울에서 내쫓고 남하할 때 조령을 보고 “이 처럼 좋은 지형을 두고도 지키지 않았으니 신립 장군의 무지와 무모함을 알 수 있겠다” 고 말했다 합니다.
제가 조선군이 조령을 지키지 않은 아쉬움에 대해 인터넷에 올려진 어떤 분의 글을 보았는데요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 방어하기 좋은 조령에서 조선군이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은 훗날 일본인들이 조선의 우매함을 폄하하기 위해서 일본이 주장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분이 우리 기록인 징비록과 선조 수정 실록에도 실려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를 공부하시려면 좀 더 자세한 사료를 더 찾아보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 자세인 것 같습니다.
참 이일 장군의 이야기 좀 더 하겠습니다. 싸움 도중 몰래 먼저 도망친 이 이일은 도망가다가 왜군 한 명을 활로 쏘아 죽인 뒤 그 자의 머리를 베어 갖고 한성 서울까지 내 달려 조정에 와서 충주 패배의 소식을 처음으로 알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저의 추측 입니다만 지금까지 이일 장군의 행태를 보면 그가 과연 왜군의 머리를 벤 것이 사실일까요? 아니면 조선인 중에 이미 죽었거나 또는 죽여서 그이 머리를 자르고 왜놈 머리처럼(사진) 면도 후 한성에 빈손으로 패전 소식을 전하면 패전 책임을 물어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조정에 도착해서는 뭐라도 내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결과가 아니었나 상상해봅니다.
한마디로 신립의 충주 패전 원인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 신립 같은 지휘관이 왜군에 대한 정보 취득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
둘째 : 조령과 탄금대라는 각각의 지형에 맞는 전략 전술의 오판 때문이라는 것.
셋째 : 조선군의 상비군 즉 훈련을 받은 정규 병력의 턱없는 부족이었다.
넷째 : 왜군 조총과 맞선 조선군의 기마병 전투 방식은 구시대적 무기 체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고요.
다섯째 : 최고 책임자인 선조 임금은 물론 그 조정 대신들 역시 인재에 대한 적임자를 헤아려 판단하지 못하는 “인선(人 選) 실패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의 개전 초기 행적
자 이제부터는 경상 우수사 원균을 좀 이야기해보죠.
원균은 임진왜란 이전 약 2개월 전에 경상 우수사로 임명되어 내려옵니다. 경상 우수영은 8관 15 포로 이순신 장군이 맡은 전라 좌수영 5관 5포 보다 2배 넘는 규모입니다. 그만큼 병력과 무기와 전선도 이순신보다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과 가까워 조선 수군 중에 가장 많은 함선과 병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상대로 싸워 이긴 최초 장군과 지역을 아십니까? 이순신 옥포해전 이라고요? 대부분 그렇게 알고 계시는데 사실은 원균입니다. 원균이 바다에 나가 일본 군선 10여 척을 불살랐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의병장 조경남이 기록한 난중잡록과 학자 오희문이라는 사람이 쓴 일기 쇄미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원균이 이러한 전과를 올린 게 승리인지 아니면 싸워 패전하고 적에게 피해를 준 규모만을 말하는지 정확치 가 않습니다. 아군의 피해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균이 최초의 해전에서 승리를 했다고는 볼 수 없는 거죠. 진정으로 승리를 했다면 배를 침몰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후로 원균은 경상 우수영을 자기 부하 장수 우후에게 맡긴 채 자기가 피해 다닐 배 한 척만 (또는 세척) 남기고 나머지 배들은 아예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고 침몰시켜 버립니다. 이유야 왜군이 배를 빼앗을 것을 대비했는지 장수가 빼앗길 것을 걱정하여 자기 전선을 침몰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죠. 지금으로 치자면 해군 이지스함 광개토함을 북한군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싸우지도 않고 자폭하는 꼴… 이거 말이 되겠습니까? 거기다가 배를 없애고는 자기 수하 수군들을 모두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하여 해체하고 뿔뿔이 흩어 버립니다.원균이 자기 배를 끌고 왜군을 피해 경상우수영의 가장 먼 서쪽 지금의 사천시 곤양이라는 곳에서 물러나 정박하고 있다가 자기 휘하 부장인 거제 옥포 만호 이운룡이 그만 도망 다니고 차라리 전라 좌수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하자는 말에 그때서 여러 번 출정 요청 통지를 보냅니다.
일본 왜군이 경상도 해안에 한 번에 넘어온 것도 아닌데 초기부터 참전해서 왜군의 도하 속도를 좀 늦춰 주었더라면 조선 육상 병력 집결과 전투태세를 제대로 갖춰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벌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왜군이 부산 및 남해 일대에 속속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단 20일 만에 수도 서울 한성까지 점령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즉 원균은 너무도 빨리 싸움을 포기를 했던 거지요.
그러고는 겨우 자기 부하의 말을 듣고서야 전라 좌수영 이순신 장군에게 빨리 좀 출정해서 도와 달라고 서신만 열심히 날린 거지요.
원균이 스스로 나서 싸우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
첫째 : 신규 부임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아 관내 현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장군으로서 업무 태만입니다.)
둘째 : 왜군의 급작스런 침입에 먼저 겁을 먹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무장의 신분으로 직무유기를 한 것입니다. )
*.결론 (역사의 교훈과 미래 희망)
우리가 역사를 읽다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때도 있고, 분노를 참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알아본 신립 장군과 원균에 대해서 한마디로 표현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죠. 징비록에 이런 옛 말이 있습니다. “장수가 군사를 쓸 줄을 알지 못하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훌륭한 리더는 일 잘하는 능력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의 힘을 모으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립과 원균 이일…. 그들에게도 나름 최선을 다해 승리해 보겠다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들이 보여준 부족함을 욕하기보다는 그때 그들의 실수와 과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즉, 그때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제는 두 번 다시 일본에 당하지 않도록 내실을 다져 나가고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초 우량 국가, 강성한 국가로 성장하여 그 누구도, 어떤 나라도 대한민국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러한 나라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차기 예고
다음번 영상에서는 / 서울 한양 가까이 다가온 왜군에 대해 조정에서 벌어진 이야기와 선조 임금의 파천 이야기 그리고 이순신 장군님이 첫 출전한 옥포 해전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문학 TV 고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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