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통일진나라의 멸망 (5) – 진시황 본기

팡씨1 2019. 12. 22. 10:30

제목 : 통일진나라의 멸망 (5) – 진시황 본기

   

오늘의 내용 개략 소개

 

통일 진나라의 멸망  / 우매한 2세황제 호해 그리고 간신 조고 / 기득권층 이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진시황제가 마지막 순행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과 시황제를 안장한 여산릉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드렸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이세 황제가 된 호해와 통일 진나라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개략 오늘의 주요 내용 설명)

진시황이 사구에서 죽고 난 이후 막내아들 호해는 맏형 부소와 몽염 장군을 죽게 한 다음 아버지 진시황제를 흉내 냅니다. 아버지를 진나라 최고의 권력자로 포장도 하고 아버지처럼 전국 순행도 다니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의 권위는 새울 수 못하게 되죠 그러니까 이때 간신 환관 조고가 문() 보다는 무()로 다스려야 한다며 악덕을 부추깁니다. 백성들의 고충이었던 건축 공사 아방궁도 다시 짓고 법령도 더 강하고 까다롭게 정하고… 이러니 백성들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게 되죠 결국 옛 초나라 지역에서 진승과 오광 등이 나무 죽창 농기구 등을 들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봉기를 일으킵니다. 이런 상황에도 호해는 민심을 돌보기는커녕 오히려 봉기가 일어났다는 알자의 말에 화를 내며 그를 죽여버립니다. 진나라 장수 장한이 그나마 죄인들을 풀어 군사로 만들고 전국의 봉기를 막아 보지만 이 와중에 간신 조고는 아예 호해의 눈과 귀를 막아 버립니다. 아예 정보를 차단시키는 것이죠 그리고는 주변에 호해에게 진정성을 담는 이야기를 할 만한 신하들을 죄를 뒤집어 씌워서 특히 이사를 죽도록 만듭니다. 한수 더 더서 호해는 전국에서 민란이 이는 것은 자지의 잘 못이 아니라 신하들의 잘못이라며 책임도 전가합니다. 조고는 아예 궁궐 내 모든 정권을 장악하고 모반까지 생가하며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짓)의 상황까지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잘 버티고 싸우던 장한 장군마저 초나라 항우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나라가 이모양이 되니 조고는 호해에게 혹시라도 죽음을 당하게 될까 두려워 아예 반군이 궁궐 가까이 온 것처럼 겁을 주고 스스로 자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조고는 황실의 혈육인 자영을 세워 삼세 황제로 삼았지만 결국 자영은 조고의 간사함을 알고 먼저 조고를 살해하고 뭐 좀 해보려고 했지만 왕이 되고 겨우 46일 만에 함양에 당도한 유방에게 항복하고 만다. 자영은 얼마 후 뒤따라 함양에 들어온 항우에게 죽음을 맞고 BC207년 진나라는 결국 멸망을 합니다.

 

자 그럼 오늘 이야기 순서는

1) 호해가 진나라 2세 황제가 되고 난 이후 진나라의 혼란과 멸망까지 가게 되는 사연과

2) 사마천 이외 한나라 초기 문장가 가생(가의(嘉義))이 말하는 진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사기의 기록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    책 내용 속으로

 

 

호해는 21세의 나이에 황제가 된 겁니다. 어려서부터 자기를 가리켰던 조고를 낭중령으로 삼아 나랏일을 좌지우지하게 합니다. 신하들은 이제 황제가 바뀌었으니 띄워 줍니다. 옛 선조 왕과 공들에 대한 제례를 진나라를 처음 세운 양공 묘만 남기고 모두 없애고 시황제의 묘만 남겨 시조묘로 삼고 현재 황제가 된 호해에게는 아버지 시황제가 짐()이라 처음 불렀다가 진인(眞人)으로 바꾼 것을 다시 짐이라 부르라며 아첨을 떱니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니 백성들이 복종하지도 않고 하니 조고와 상의해서 아버지 흉내를 내기로 합니다. 전국을 순행하기로 한 거죠 그래서 옛 연나라 지역 갈석산을 돌아 남쪽 회계산까지 와서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글이 있는 비석 측면에 함께 했던 수행 신하들의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긴 비석에 시황제란 칭호가 빠졌다며 이 호칭이 안 들어가면 훗날 누가 비석을 세웠는지도 모를 것이고 결국은 공덕비에 세긴 업적이 누구의 업적 인지도 모를 것이라며 시황제라는 호칭을 추가로 새겨 넣기로 합니다.

순행을 다며 오고도 황제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것을 느낀 호해가 조고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조고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대신들은 시황제 때 공적을 쌓은 공신들인데 반해 저는 비천한 신분으로 호해 황제의 이쁨을 받고 있다며 시기해서 낭중령인 저의 말은 겉으로만 듣는 척하고 따르지 않는다며 마침 순행 시 보았던 지방 군, 수등 관리 중에 벌줄 사람 몇 명 딱 골라 사정없이 처벌하시고 비천한 자를 귀하게 하고 빈곤 한자를 부귀하게 만들어주면 멀리 있는 자를 가까이 있게 하면 위아래가 한뜻으로 되어 편안할 것입니다. 라며 간신 같은 조언을 합니다. 아둔한 호해가 조고의 이 말을 옳다고 여겨서 대신 몇과 공자들을 몇 명 본보기로 죽여버립니다. 죄도 없는 공자들이 죽어 나가니 종실 사람들은 두려워졌고 신하들은 간언을 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아첨하기로 맘을 바꿉니다. 이것이 바로 호해가 폭군이 되어가는 시작점이었죠. 물론 진시황도 폭정을 했다고 하지만 호해는 아예 죄목도 씌우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을 마구 처단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못 이룬 대업을 잇겠다며 짓다만 함양의 아방궁을 다시 건설하라고 하니 백성들 중 누가 반기겠습니까? 법령도 갈수록 더 각박하고 심하게 했으니 결국 민란이 일어나고야 만 거죠 그것도 빈천하고 보잘것없던 진승이나 오광 같은 사람이 말이죠 진승(진섭)이 봉기할 때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 , 제후, 장수, 대신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라는 말로, 사람의 신분은 노력 여하에 따라 높게 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 하며 일어났다죠? 중국 최초 민중 봉기입니다. 이때 알자(황제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자) 한 명이 황제에게 민란을 보고 했는데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전해 들은 호해가 화가 나서 그 자를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이후 또 다른 사자가 도착했는데 황제가 상황을 묻자 “지방 관료들이 다 잡아들였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며 허위 보고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상위자가 너무 강하게 압박하거나 몰아붙이면 하위자는 일단의 위급함을 피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죠 호해가 딱 그런 리더였던 거죠. 이세 황제 호해는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전국은 무신은 조왕에 위구는 위왕에 전담은 제왕에 유방을 패현에서 항량은 회계에서 근거지를 잡고 이미 제후 수준의 위치에 올라 있던 시점입니다. 이때가 기원전 209년입니다.

 

다음 해 BC208년 호해가 황제가 된 지 2년 차입니다.

반란군의 기세가 더 커지자 호해가 걱정을 하며 장한 장군에게 대안을 묻습니다. 그러자 장한 장군이 군사 모으기는 글렀으니 차라리 여산의 죄수들을 모두 동원해서 반군을 공격하자고 제안합니다. 호해가 승낙하고 결국 장한은 동예와 사마흔 장군까지 더 합류해서 반란군 주모자 진승을 성보라는 곳에서 그리고 항량을 정도에서 위구를 임제에서 모두 죽이고 조왕 헐 까지 어느 정도 반란군을 진압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간신 조고가 궁궐에서 또 호해를 구워삶습니다. “선제 진시황께서는 막강해서 함부로 신하들이 대들지도 못하고 깨갱 했는데 지금 호해 황상께서는 나이가 어리다고 대신들이 이것저것 나라의 대소사를 이러쿵저러쿵 보고하는데 그러다 뭐라도 잘못되면 신하들에게 약점을 잡히게 됩니다. ‘짐’(朕 나짐 : 내가 누구야 천자야 이거 왜 이래)이라는 뜻이 뭡니까 군신들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궁궐에 깊이 머물면서 저와 함께 모든 일을 결정하시지요”라는 밀실 정치를 제안한 거죠. 멍한 호해가 냉큼 승낙을 하고 정치와 통치를 모두 환관 조고에게 맡겨 놓고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까 대신중에 우승산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등이 호해에게 아직도 관동 지방은 도적이 들끓고 백성은 노역에 지쳐있으며 세금도 강하게 징수하니 민심이 흉흉한데 아방궁 짓는 일을 좀 관두시면 어떠시냐고 직언을 합니다. 이 말에 호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옛 요임금 순임금은 고귀한 천자임에도 스스로 힘써 직접 백성들과 함께 했지만 난 거기서 배울 게 없다 내가 천자인데 내가 왜? 난 그럴 생각 없네 오히려 너희들은 신하인데도 불구하고 백성들 봉기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선제 아버님께서 벌리신 궁궐도 짓지 말라고 하니 이것은 오히려 신하로서 불충한 것이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며 호통을 치고 화를 내어 죄를 묻고 심문을 하니 풍거질과 풍겁은 대신인데 모욕 당하 것 같아 스스로 자결해 버리고 시황제 시절 잘 나갔던 이사만 살아 옥에 갇히게 됩니다.

 

BC 207년 호해 3년입니다.

장한 장군이 거록 전투에서 끝내 항우에게 패하고 이제 밀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이사는 자기의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조고는 쌩판 무시하고 이사의 장남이자 삼천 태수였던 이유가 진승의 군대가 지나갈 때 막지 않았고 이사와 진승이 서로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반역했다고 호해에게 무고를 하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이사를 붙잡아 고문을 합니다. 가혹한 고문에 못 견딘 이사는 결국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인정했고, 호해의 명령으로 결국 함양의 시장에서 요참형 (허리 잘림)을 당합니다. 계속 밀리던 장한은 호해의 꾸지람을 받자 사마흔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지만 조고가 만나주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니까 차라리 냅다 도망치기로 합니다 그리고 장한을 만나서는 조고가 전권을 장악하고 제멋대로 섭정을 하니 당신이 반란군과 싸워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당신도 죽게 될 것이라고 전하자 충성스럽고 용감했던 장한 장군마저 자기 군사를 이끌고 항우에게 항복하고 귀의해 버립니다. 아둔한 주군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배신…..(기업으로 말하면 핵심 기술 노하우 들고 경쟁사로 튀는 사람, 정치인으로 말하면 정당 갈아타는 사람…. 물론 무능하면서도 기회주의자라서 갈아타는 사람도 있고, 잘 처우해 주었음에도 배신 때리는 사람도 있죠. 왜냐?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니까요)

 

자 그럼 이제 다시 돌아와서 지록위마라는 고사 성어 아시죠?

조고가 이제 한 단계 더 높여서 황상을 죽이고 스스로 황권을 찬탈하려는 생가까지 하고 시험해 봅니다. 호해와 대신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커다란 사슴 한 마리를 들이고는 호해에게 “말입니다 폐하”라고 하며 바칩니다. 이 것을 본 호해가 황당해하며 “뭐라고? 사슴 보고 말이라고? 당신 돌았소?”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대신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신들이 볼 때 이게 말인가?”…. 대신들은 세부류 였습니다. 대부분은 진실을 알고도 조고의 위세에 말을 못 하는 자, 그리고 조고의 말을 얼른 받아 말입니다라고 하는 자, 극소수 “뭔 소리하는가 사슴 보고 말이라니?” 조고는 이 세 번째 대답을 한 극소의 사람을 훗날 따로 법을 들이대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이제 황제 보다고 그 밑에 실권을 가지고 농락하던 조고의 눈치를 더 봅니다. 여러분 사회생활하시다 보면 사실을 말 못 하는 경우 많으시죠. 왜 그러셨나요? 바로 조고 같은 부류의 인간들 때문에 그러셨죠? 앞에서는 온갖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하지만 뒤에서 호박씨를 열심히 까시고 계신 분 때문에…. 왜죠? 호해 같은 사람이 또 한 명 가까이 있어서죠…. 이게 조직이고 이게 사회생활입니다. 답 없습니다. 그냥 버티는 겁니다 조고도 이제 곧 골로 가니까요. 고전을 읽는 재미, 역사서를 읽는 재미가 뭐겠습니까. 바로 이런 구절에서 나를 반추하고 돌아보고 나아가는 것이죠.

 

조고는 관동의 민란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 당시 관동 지역은 지난 통일전 전국시대의 제후국 이름으로 새로운 제후들이 들고일어나 모두 호응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조고는 이제 자기가 황제가 되는 꿈에 매몰되서 돌아가는 상황을 믿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죠 어느덧 한나라를 새운 유방이 무관을 지나 함양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제야 이 소리를 호해가 알게 되면 자기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져서 호해가 주관하는 조회에 가지를 않습니다. 도둑놈 제 발 저린 꼴이 된 거죠. 결국 조고는 염락과 조성이라는 하수인과 모의를 해서 호해가 간언을 안 듣다 이제 그 화를 자기들에게 돌리려 한다며 호해 황제를 끌어내리고 황가의 한 사람인 자영을 새롭게 황제로 세우기로 합니다. 그리고는 염락에게 반란군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게 하고 호해가 있는 궁궐에 까지 들어가 도적떼(반란군)인 것처럼 들이닥쳐 호해를 위협을 합니다. 혼비백산한 호해가 이때 가까이 있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사태가 이지경이 되도록 왜 알리지 않았느냐며 노하자 그 환관이 말하기를 “제가 황상께 진실을 말했더라면 진작에 처형당했을 것인데 그나마 지금까지 말하지 않아 살아남았다”라고 대답합니다. 염락이 이제 호해 앞에 서서 당당하게 호해의 죄상을 열거합니다. “ 당신 호해는 교만하다, 방자하다. 사람 죽이기를 우습게 안다.

이 소리를 듣고 호해가 승상 조고를 찾습니다. 염락이 단호히 거부하자 호해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져서 찌질이가 되어 갑니다.

“나 군 하나만 줘 나 거기서 황제 아닌 왕이 될게”

“안되오!

“그래 그럼 만호후라도 시켜줘”

“안되오!

“그래 그럼 내 처 자식과 함께 백성이 될게 살려나 주쇼”

“승상 조고가 당신을 죽이라고 했소”

황제였던 호해가 자존감의 붕괴가 왔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염락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런 젠장 내가 나 스스로 죽겠소” 그리고는 스스로 자결하여 죽습니다. 이것이 제2대 황제 호해의 최후 모습입니다.

조고가 호해가 자결했다는 말을 듣고 이제 자영을 데려와 황제가 아닌 왕으로 삼게 됩니다. 여기서 자영은 호해 형의 아들이라 합니다. 지금까지 조고의 성향을 잘 알고 있던 자영은 왕에 오르는 의식을 치르기 전에 자기 아들과 협심하여 조고에게 당하기 전에 먼저 간신 조고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일부로 종묘에서 왕 즉위식을 하다 조고의 계략에 빠질 것에 대비해 의식에 가지 않고 기다립니다. 결국 답답한 조고가 자영이 있는 곳으로 왔다가 일시에 자영의 아들들에게 저격을 당해 죽습니다. 간사하던 조고도 드디어 죽음을 맞게 된 것이죠 … 소설 같죠?

자영이 왕이 되고 46일 만에 유방이 무관을 지나 패상에 도착해서 자영에게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서 뒤늦게 함양에 도착한 항우가 진나라 수도 함양을 다 노략질하고 자영외 모든 함양 사람을 도륙하고는 폐허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진나라는 BC 207, 진나라 양공이 춘추시대인 기원전 776년 건국 후 약 600백 년 뒤, 통일 진나라로 따지면 15년 만에 망하고 맙니다.

 

사마천은 진시황 본기 마지막에 같은 한나라 시대 문신이었고 가생이 적은 과진론에 대한 글을 추가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가생은 사마천이 초나라의 우국 충신인 굴원과 함께 굴원가생열전 속에서 그 인물 됨을 기록했었던 사람입니다.

 

(가생(가의(嘉義))이 말하는 진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

 

얼마나 나라가 어지러웠으면 듣보잡이며 빈천했던 군졸 진승이, 그것도 호미 서가래 몽둥이를 들고 봉기에 일어났을까? 또 진나라가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훌륭했던 장한 장군이 황상을 배신하고 믿기지 않는 모반을 했을까? “원래 진나라는 목공 이래로 강국이 되었는데 어찌 목공의 현명함 때문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형세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통일을 이룬 시황제 업적을 깔아 내리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시황제에 대해 평가 하기를 “시황제는 자기 자신에 만족해 타인의 의견을 묻지도 않는 자”라고 하며 거기다 “뒤를 이은 2세 황제 호해는 거기에 포악함까지 더해 화를 가중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자영은 외톨이로 보좌하는 측근마저 없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당시 훌륭한 선비가 있었지만 나서지 못한 것은 진나라 법에 피하고 금지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충성스러운 말이 입에서 나가기도 전에 몸이 죽어 없어졌기 때문인데 이는 천하 선비로 하여금 귀로 듣게만 하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게 만든 것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생은 이 같은 진나라의 잘못을 비유하며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스승이 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나라 승상이었던 이사가 주창하고 시황제가 시행했던 유생을 생매장했던 갱유 사건…” 유생들이 옛 것을 앞세워 오늘날의 것에 반대한다”라는 주장과는 정 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진나라 시황제는 천하 통일 이후에 기만과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통일 이후부터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변화가 따랐서야 한다. 한마디로 창업과 수성은 다른 것인데 변화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대한 실수요. 그를 이은 2세 황제 호해의 실수는 시황제의 강압적 통치에 힘겨웠던 백성들은 이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자 새로운 변화와 변모를 기대했지만 호해 역시 이를 저버리고 오히려 무도한 것을 더하고 아방궁을 다시 짓기 시작하고 형벌은 더 심하게 했으니 백성들은 동요되어 진섭 같은 별것 아닌 자에게도 천하가 호응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마천은 “진나라 2세 황제 호해가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어서다.”라는 내용으로 가생이 기록한 과진편(過秦篇)을 진시황 본기의 말미에 전문을 이용하여 가의의 견식을 칭찬하고 마무리 짓습니다.

 

오늘 역사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2.    인문학적 고찰

 

 

여러분

오늘 이야기 속에서 호해라는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던 조고라는 인물 어떻게 생각되셨습니까?

진나라가 멸망한 이유가 어찌 한 두 가지 원인만 있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진시황제의 폭정과 강압 정치 때문이라고 알고 계십니다. 무론 그렇기도 하지요

나라의 일은 모르는 겁니다. 만약 호해가 현명하고 그를 보좌하던 조고나 이사 같은 인물이 개인의 안위를 위해 행동하지 않고 선대 황제의 오점을 수정하고 충성을 다하여 황제의 잘못을 진언하여 황제가 바른 도리를 하도록 신하들이 솔직하게 충고했었더라면, 지혜롭게 지식인들이 묘책을 내었더라면. 어지러워진 천하를 바로잡아 통일 진나라가 15년 만에 망국의 길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 사람 사마천이 전하는 진나라 진시황 본기를 통해서 우리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망국의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소통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마음의 귀를 열어 놓지 않으면, 또 그 참모들 역시 눈치 보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보여 주지 않는다면 처참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인문학 Tv 고경이었습니다.

 

 

3.    차기 예고

 

 

자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고요. 지금까지 5편에 걸쳐서 사마천 역사서 진시황 본기를 다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사마천 사기의 첫권, 오제 본기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많이 듣고 알고 있던 요임금 순임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음 시간도 많이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