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사마천 사기 은본기

팡씨1 2020. 2. 1. 22:45

사마천 사기 은본기(殷本紀)2

2020.2.1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마천 사기 은본기(殷本紀)에 들어가기에 앞서 은나라의 유물 갑골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사마천 사기 은본기 내용으로 들어가서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과 마지막 나라를 잃게 된 은나라 주왕까지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은나라 창업을 이룬 탕왕 이야기 


(상나라) 나라는 BC1600~BC1046년 약 600년을 이어온 왕국입니다. 은나라는 사마천 사기 역사책에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역사에서 지난번 영상에서 말씀 드리 바와 같이 갑골문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굴되면서 전설이 아닌 실존했던 왕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초로 역사적 근거를 갖게 되는 실체가 확인된 나라가 되겠습니다. 원래 은나라는상나라라고 불려져야 타당합니다만 상나라가 은허라는 지역을 상나라의 도읍으로 삼은 기원전 1300년 이후 은나라라고도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상나라, 은나라는 같은 왕조를 의미하게 되는 거죠. 오늘 이 시간에는 은 왕조인 탕 임금부터 은을 멸망에 이르게 한 주왕까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는데요 먼저 창업을 이룬 탕 임금의 조상부터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2) ()나라를 세운 탕임금의 조상 설()


탕 임금의 13대 조상은 순임금, 우임금 때 활동했던 설이라는 사람입니다. ()은 오제 본기에서 나왔던 제곡의 둘째 부인인 간적(簡狄)이라는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하루는 어머니 간적이 목욕을 하러 갔다가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받아 삼켜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은 장성하여 하나라 우() 임금의 치수사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고, 그 이전 순() 임금 때에는 순임금이 설에게 사도(司徒: 교육부 장관)를 맡겨 백성들을 가르치고 교화하게 했습니다. 순임금 때 설이 공을 쌓자 순임금이 설에게 상() 땅을 봉하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내려줍니다. 그래서 상나라가 유래되었고 설은 은() 나라를 세운 탕 임금의 시조가 되는 겁니다. 그 뒤로 13대 설의 후손으로 천을(天乙)이 후대를 이었는데, 이가 바로 성탕(成湯)입니다. 탕은 선왕(先王)이었던 제곡을 추종하여 옛 박() (현 산동성 조현(曹縣) 남쪽 20km 지점. 옛날 하왕조의 도읍지) 땅을 도읍으로 정합니다.

 

3) 탕이 하나라를 정벌하고 상나라를 건국하는 이야기


탕은 하왕조의 제후 중 하나인 갈백(葛伯)이 제사를 올리지 않자맑은 물에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듯이 백성을 보면 그 나라의 맑은지 어둔지를 알아볼 수 있다며 이웃 제후국인 갈백의 지역을 가장 먼저 정벌합니다. 이때 탕을 따르던 이윤이 나서며 탕의 행동과 언행을 두둔하며 응원합니다.


-. 훌륭한 창업자에게는 걸출한 조력자가 있는 법 (이윤)

이윤(伊尹)은 탕() 임금을 도와 하() 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을 토벌한 상() 나라의 창업공신입니다. 원래는 탕 임금의 부인 유신씨(有辛氏)의 잉신(媵臣 : 제후들의 딸이 시집갈 때 데리고 가는 남자 몸종)이 되어 정(:원형 솥)과 조(:음식을 닮는 그릇))를 메고 탕에게 갔다가 탕 임금에 의해 발탁되어 상나라의 국정을 맡게 된 인물입니다. 이윤은 이후 탕 임금이 하나라를 멸하고 상왕조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후에 탕 임금의 뒤를 이은 임금도 보좌했고 계속해서 탕 임금의 직계 손자인 태갑(太甲)을 왕으로 옹립하여 올바른 정치와 법도에 대해 가르쳤지만 태갑이 정치를 포학하게 하고 탕왕이 세운 법도를 어지럽히자 이윤은 태갑을 쫓아내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상나라를 다스리다가 3년 후에 태갑이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자 그때서 이윤이 다시 태갑을 맞아들여 왕위에 복위시켰던 그러한 인물입니다. 이윤은 태갑의 뒤를 이은 옥정(沃丁) 임금 때 죽습니다.

 

이윤은 음식의 맛을 예로 들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여 탕이 왕도(王道)를 실행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혹은 이윤이 처사였는데, 탕이 이윤을 맞아들이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다섯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탕의 초빙을 맞아들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때 이윤은 탕의 신하가 되어 탕에게 군주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소왕(素王) 스타일 (높은 덕으로 존경을 받아 추대되었음에도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성인)과 구주(九主)(아홉 가지 군주 스타일: 1.법군(法君)/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군주 2. 전군(專君)/독단적인 군주 3. 수군(授君)/다른 사람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군주 4. 노군(勞君)/스스로 힘써 천하를 위해 노력하는 군주 5. 등군(等君)/논공행상을 균등하게 잘하는 군주 6. 기군(寄君)/백성들은 고행하는데 그 위에 교만하게 군림하여 패망을 자초하는 군주 7. 파군(破君)/나라를 망하게 한 군주 8. 고군(固君)/성지(城池)를 굳건하게 쌓을 뿐 덕을 베풀지 않은 군주 9. 삼세사군(三世社君)/ 어린 나이에 군위에 오른 군주)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에 감동한 탕은 이윤을 등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합니다. 사실 이윤은 그전에 탕을 떠나서 하나라로 갔다가 하나라 걸왕이 이미 부패했음을 목격하고 다시 박()으로 돌아왔습니다.


-. 훌륭한 창업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탕

탕이 교외로 나갔는데 사방에 그물을 치고 하늘에 대고 「날아다니는 모든 새들을 전부 다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해 주소서! 」하며 기원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탕이 「어허! 이런. 한꺼번에 다 잡으려고 하다니!」하고는 탕이 그 사람에게 한 면만 남기고 세 면의 그물을 거두게 하고서 다음과 같이 축원하도록 시킵니다.

「왼쪽으로 가려고 하는 새는 왼쪽으로 가게 하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새는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말 안 듣는 새만 내 그물에 걸리게 하소서.….

당시 하나라의 제후들은 탕의 이러한 소식을 듣고 「지극한 탕의 덕이 금수(禽獸)에까지 이르렀구나!」라고 하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 탕이 하나라 걸왕을 몰아내기 위한 당위성 이야기

당시 하나라의 걸왕(桀王)이 주색에 빠져 포악한 정치를 행하자 제후국인 곤오씨(昆吾氏:지금의 허난 성 복양시(濮陽市) )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탕이 군사를 일으켜 제후들을 인솔하고 이윤과 함께 직접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한 후에 계속해서 걸왕까지 정벌하려고 하면서 군사들과 제후들을 향해 말했다.

「자, 여러분! 모두 이리 와서 내 말을 자세히 들으시오. 내가 감히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하려고 함이 아니라, 하나라의 걸왕이 너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오. 하걸을 정벌하려는 나에 대해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여 하나라를 감히 정벌하지 않을 수 없소. 하늘은 나에게 죄를 너무 많이 저지른 하걸을 벌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오. 지금 여러분 가운데 농사짓기도 바쁜 이 시기에 무슨 전쟁이냐 또는 걸왕이 뭔 죄를 지었다느냐? 하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걸과 그 신하들은 큰 공사들을 일으켜 징발된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가혹하게 착취했소. 그 결과 하나라 백성들은 나태해지고 서로 불복하게 되었소. 마침내 백성들은 『저 태양은 언제나 지려는고? 나는 차라리 저 태왕과 함께 사라지리라!』라고 불만을 말하기 시작했소. 하나라의 덕이 이와 같이 무너졌으므로 지금 내가 정벌하고자 함이오. 그대들이 하늘의 징벌을 대신하도록 나를 도와준다면, 그대들에게 큰 상이 돌아가게 하겠소. 내 말을 믿어 주시오. 나는 결코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오. 만일 그대들이 나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징벌을 내리고, 결코 너그럽게 대하지 않겠소.

결국 하나라 걸왕은 상의 탕과 싸워 패하고 명조(鳴條)로 달아나자 하나라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무너졌다. 이윤이 제후들을 향해 하나라를 정벌한 탕의 공적을 제후들에게 공포했다. 이로써 제후들은 모두 탕의 명을 받들어 귀의했다. 상탕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안정시켰다.


-. 승리한 상나라 탕왕의 왕권 굳히기 작업

탕왕이 본국인 박()으로 돌아와 3월에 동쪽 교외에 나가서 여러 제후국의 군주들에게 선포했다.

「백성들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거나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내 그대들을 징벌할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

왕이 또 일렀다.

「옛날 하우(夏禹)와 고요(皐陶:법무장관)는 오랫동안 밖에서 일하며 백성에게 많은 공을 세워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소. 이들은 동쪽의 장강(長江), 북쪽의 제수(濟水), 서쪽의 황하, 남쪽의 회수(淮水) 등 사독(四瀆)을 잘 흐르도록 다스려 만민이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소. 또한 후직(后稷)이 파종하는 방법을 전해주어 농민들이 백곡을 경작하게 되었소. 이들 삼공(三公)은 모두 백성을 위한 일에 공로를 세웠기에 그들의 후대가 모두 나라를 얻을 수 있었소. 옛날 치우(蚩尤)와 그의 대부가 난을 일으켰으나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았던 선례가 있소. 선왕들의 말씀을 따르는 데 힘써야만 하오」

왕이 또한 일렀다.

「정도(正道)를 행하지 않으면 그대들의 나라가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겠으니, 그때 가서 나를 원망하지 말라!

탕이 역법(曆法)을 개정하고, 복색(服色)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하였으며 조회를 낮에 하기로 결정했다.

 

4) 탕 이후의 왕위 계승과 은 왕조의 성쇠

 

-. 태종(태갑제) 이야기 이윤의 두각

탕이 붕어하고 그 아들이 즉위했다가 붕어하자 이윤은 탕임금의 직계 장손 태갑을 즉위시켰다 그가 태갑제가 되었다. 태갑제가 즉위하고3년이 되자 정사에 밝지 못하고 포악해져 탕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을 문란하게 했다. 그래서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쫓고 자신이 3년 동안 섭정하면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갑제가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자, 이윤은 태갑제를 영접하여 그에게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태갑제가 덕을 수양하니 제후들은 다시 은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 이에 이윤이 태갑제의 공덕을 기려 태종(太宗)이라고 칭했다.

태종이 붕어하고 그 후손들이 이어 가다가 옹기(雍己)가 즉위했다. 옹기제 시절 은나라의 국세가 쇠약해지자 제후들 중에 조회를 올리지 않는 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 중종(태무제) 이야기 이윤의 아들 이척 두각

옹기제 다음으로 동생 태무(太戊)제가 즉위하여 이척(伊陟:이윤의 아들)을 재상으로 삼았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아름이 넘게 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자 태무제가 두려워서 이척에게 그 영문을 물어보았다. 이척이 대답했다.

「신이 듣자 하니 괴이한 일도 덕행은 이기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왕께서 행하신 정치에 잘못은 없었는지요? 왕께서는 덕을 행하고 몸을 수양하는데 힘쓰십시오」

태무제가 이척의 말대로 하자 불길한 징조인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은나라가 다시 흥하게 되어 제후들이 은나라에 복종하게 되었고 태무제는 이척을 칭송하면서 그를 신하 이상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이척은 사양했다. 태무제를 은나라의 중흥자라는 뜻에서 중종(中宗)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 도읍을 자주 옮기게 되는 상나라 흥망이 자주 반복된다.

중종 태무제 이후 아들 중정(中丁)이 즉위하였다. 중정제는 오()로 천도하였는데, 나중에 다시 하단갑제(河亶甲帝)에 이르러 상()으로 천도하였고, 조을(祖乙)이 다시 형()으로 천도하였다.

중정제 외임제다 - 하단갑이 즉위한다. 하단갑제 시기에 은의 정치는 다시 쇠락해졌다.

하단갑제 아들 조을(祖乙)이 즉위했다. 조을제(祖乙帝)는 은왕조를 다시 부흥시켰다. 이때는 무함의 아들 무현(巫賢)이 상이 되어 정무를 담당했다.

조을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 후손들이 주욱 이어가다가 양갑제(陽甲帝) 때에 이르러 은나라가 다시 쇠퇴하였다.

중정제 이후로 적자계승제도(嫡子繼承制度)가 폐지되고 형제와 형제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하니, 제위 계승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되어 구세 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제후들이 조회하러 오지 않게 되었다.


-. 반경제 드디어 도읍을 은으로 정하고 흥하게 되다.

양갑제가 붕어하자 동생인 반경(盤庚)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반경제다. 반경제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은왕조는 이미 허베이(河北)에 도읍하고 있었다. 이에 반경제는 성탕의 옛 도읍지에 거주하기 위해 다시 하남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은왕조는 이미 다섯 차례나 천도하면서 정해진 거처가 없었기에, 은의 백성들은 모두 걱정하고 원망하며 또다시 이동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경제가 제후와 대신들을 타일렀다. 이에 하남으로 옮기어 박()을 정돈하고 옛 탕임금의 법령을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은 왕조의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제후들이 모두 입조 하게 된 것은 반경제가 성탕의 덕정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 고종(무정제) 꿈에 본 사람 부열을 등용하다.

반경제가 붕어하자 주욱 후대를 이어 가다가 무정(武丁)이 즉위했는데, 무정제는 은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하였으나 아직 자신을 보좌해줄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가 결정하도록 하고서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무정제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꿈속에서 그는 이름이 열()이라고 하였다. 무정제는 꿈에서 본 성인의 모습을 대신과 관리들 속에서 찾아보았으나 모두 아니었다. 이에 백관들에게 재야에서 열심히 찾아보게 했는데, 드디어 부험(傅險)이라는 곳에서 열을 찾아냈다. 이때 열은 죄를 짓고 노역에 끌려나가서 부험에서 길을 닦고 있던 중이었다. 무정제에게 알현시키니 무정제는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이에 그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으니 은나라가 훌륭히 다스려졌다. 무정제는 부험이라는 지명에서 성을 따와서 그를 부열(傅說)이라고 불렀다.


-. 고종(무정제) 조기의 진언에 은나라가 흥해지다.

무정제가 성탕에게 제사를 올린 다음날, 꿩이 날아와서 정()의 손잡이에 앉아 울었다. 무정제가 이를 불길하게 여기자, 조기(祖己)가 말했다.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정사를 바르게 처리하십시오.

조기는 계속해서 진언했다.

「무릇 하늘이 인간을 감찰하는 데는 그들의 도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늘이 내려준 수명에 길고 짧음은 있으나, 결코 하늘이 인간을 요절시키는 경우는 없으며, 인간의 행동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으므로 하늘이 인간에게 재앙을 내려서 그의 행동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제야 『이를 어찌하나?』 하고 한탄합니다. 아! 임금께서 백성을 위해서 힘껏 노력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며, 제사를 지내는 방법에는 상규(常規)가 있는 법이니 버려야 할 잘못된 방법을 신봉하지 마십시오!」

조기의 진언을 받아들인 무정제가 정사를 바로잡고 은덕을 베푸니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은나라의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무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경제(祖庚帝)가 즉위하였다. 조기는 무정제가 꿩이 정의 손잡이에 날아들어 울었던 일을 계기로 삼아 덕정을 베푼 일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고종(高宗)이라고 칭했다.

조경제 이후 후대로 가다가 무을(武乙)이 즉위했다. 이때 은나라는 다시 박을 떠나서 허베이로 천도했다.


-. 무도하여 벼락 맞고 죽은 왕 무을제

무을제는 무도하여 우상을 만들고 이를 천신(天神)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상과 도박을 하면서 옆 사람에게 심판을 보게 하고는 천신이 지면 천신을 모욕하였다. 또한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고서 이를 사천(射天:하늘을 활로 쏜다)이라고 명명했다. 무을제는 황하와 위수(渭水) 사이로 수렵을 갔다가 갑자기 친 천둥과 벼락에 벼락 맞고 그만 죽고 말았다. 은왕조는 세대를 이어 갈수록 더욱 쇠퇴해졌다.


-. 은왕조의 마지막 폭군 주왕의 출생

벼락 맞은 왕의 손자 을제의 큰아들은 미자계(微子啓)였으나, ()의 모친이 정비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작은 아들 이름은 신()리라고 했는데 그의 모친이 을제의 정비였기 때문에 그가 태자가 되었다. 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신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제(辛帝)이고, 세상 사람들은 그를 주()라고 부른다. 은나라를 망친 주왕이다.


5) 은나라 마지막 천자 주왕과 그의 포악 무도한 이야기


-. 너무도 잘났던 주왕 하지만 음탕하기 이를데 없었다.

주제(紂帝)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 또한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하여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 못하다고 여겼다. 반면 이런 능력자가 술과 음악에 탐닉하고 여자들과 음탕 함을 무척 즐겼다. 특히 달기(妲己)라는 여인을 무척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악사인 사연(師涓)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하게 하고, 저속한 춤과 음탕하고 퇴폐적인 음악을 새로 만들도록 했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걷어 들여 돈은 녹대(鹿臺)를 채우게 하고 곡식도 창고를 가득 채우게 하였다. 또한 천하에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동물을 수집하여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沙丘)의 동산을 크게 확장하여 여러 가지 야수와 새들을 잡아다가 이곳에 풀어놓았다. 주제는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또한 사구에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들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처럼 고기를 매달아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 (주지육림(酒池肉林) 술 주/연못 지/고기 육/수풀 림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술잔치를 비유하는 말)


-. 주왕의 무도함과 포악함.

주왕(紂帝)의 이런 행동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가고 배신하는 제후들도 나타나자, 주는 형벌을 강화시켜서 포락(炮烙:  포락지형으로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죽게 하는 형벌이다. 주왕과 달기는 불구덩이에 떨어져 불에 타죽는 죄수들의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이라는 형벌까지 만들어냈다.

당시 주왕의 신하로 삼공(三公) 서백창(西伯昌), 구후(九侯), 악후(鄂侯)가 있었는데 구후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주에게 바쳤다. 그러나 주는 구후의 딸이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노하여 그녀와 함께 구후를 죽였다. 그리고는 구후의 시신을 포()를 떠 소금에 절였다. 이런 주왕의 포악한 모습을 본 악후가 이를 따지자 주왕은 한술 더 떠 악후 포를 떠서 죽였다. 서백창이 이 소식을 듣고 혼자 탄식했더니 숭후호(崇侯虎)가 이 사실을 알고는 주왕에게 고자질하자, 주왕은 서백을 유리()에 가두었다.


-. 주왕의 폭정에서 기사회생한 서백창(주 문왕)

서백의 신하인 굉요(閎夭) 등이 미녀와 진기한 보물, 준마 등을 구하여 주에게 바치자 주는 그 때서 서백을 사면했다. 감옥에서 석방된 서백은 낙수(洛水) 서쪽의 땅을 바치며 포락의 형벌을 없애 주기를 청원했다. 주가 이를 받아들여 서백에게 활,화살 큰 도끼를 (궁시부월(弓矢斧鉞)) 하사하여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서방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주는 비중(費中)을 등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했다. 비중은 아첨을 잘하고 사리사욕만 채웠기 때문에 은나라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였다. 주는 또한 오래(惡來)를 등용했는데, 그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좋아했으므로 제후들은 이 때문에 은나라와 더욱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 서백의 세력 강화와 폭정하는 은나라 주왕에 대한 쿠테타

서백이 귀국하여 드러나지 않게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니 많은 제후들이 주()왕을 등지고 서백을 추종하게 되었다. 서백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서 주왕의 위세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주왕의 숙부인 비간(比干)이 간언을 했지만, 주왕은 듣지 않았다. 당시 사람됨이 어질어 백성이 많이 따랐던 상용(商容)이라는 사람을 주왕은 등용하지 않았다. 서백이 기국(饑國)을 정벌하여 멸망시키자, 이 소식을 들은 주왕의 신하 조이(祖伊)가 서백창이 세우려는 주() 나라가 두려워 급히 은나라 주왕에게 가서 이렇게 고하였다.


-.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은 주왕

「하늘이 이미 우리 은나라의 명을 단절시켰기 때문에 신통한 점쟁이에게 미래를 투시해보고 거북 껍데기로 점을 쳐봐도 우리의 앞날이 길하지 않다고 나왔습니다. 이는 선왕들이 우리 후손을 보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임금께서 음란하고 포악함으로써 스스로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 하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왕께서는 백성이 편안히 먹지도 못하게 하였고, 하늘의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법도를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멸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모두들『하늘은 어찌하여 재앙을 내리지 않으며, 대명(大命)은 어이하여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임금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주가 대답했다.

「내가 태어나 국왕이 된 것 자체가 천명(天命)이었는데 뭔 소리 하는가?

조이는 돌아와서 한탄했다.

「주왕에게 도대체 간언 할 수가 없다.


-. 서백(주 문왕)을 이어 아들 무왕이 은나라 주왕 정벌에 나선다.

서백이 세상을 떠나자 발()이 뒤를 이었다. 이가 주무왕(周武王)이다. 무왕이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맹진(盟津)에 도착하자, 은나라를 저버리고 주나라로 모여든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모든 제후들이 주나라의 무왕에게 말했다.

「주()를 정벌할 수 있습니다.

무왕이 대답했다.

「그대들은 천명을 아직 모르고 있소!

무왕은 주왕을 정벌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돌아갔다.

주왕은 갈수록 음란해져 갔다. 주왕의 이복형인 미자(微子)가 몇 번이나 간언 했어도 주왕이 들으려고 하지 않자, 미자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하고서 은나라를 떠났다. 그러나 숙부인 비간은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충간해야 한다.」며 일관되게 계속해서 주왕에게 간언 하자 주왕이 열을 받아 화를 내며 말했다.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

주왕은 숙부인 비간의 배를 갈라 그의 심장을 꺼내보았다. 또 다른 숙부 기자(箕子)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며 남의 노비가 되고자 했지만 주왕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은나라의 태사(太師)와 소사(少師)는 은나라의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를 가지고 주나라로 달아나버렸다. 마침내 주나라의 무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왕을 정벌했다. 주왕도 군대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대항하였으나, 결국 은나라 주왕은 패했다. 주는 성으로 도망쳐 들어와 녹대로 올라가서 보옥으로 장식한 옷을 뒤집어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왕은 주의 목을 베어 큰 백기에 매달았고, 달기는 참수했다. 무왕은 갇혀있던 주왕의 숙부 기자를 풀어주고, 죽은 비간의 묘에 봉분을 해주고, 상용이 살던 마을을 표창하였다. 그는 또한 주왕의 아들 녹보(祿父)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어 은나라의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고, 잘 나가던 은나라 반경제의 정치를 집행하도록 하자 은나라 백성들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에 주나라의 무왕이 천자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군주를 제()라고 부르지 않고 왕으로 낮추어 불렀다. 은나라의 후예를 제후로 삼아 주나라에 귀속시켰다.

주나라의 무왕이 붕어하자 무경(武庚:녹보 주왕의 아들)이 관숙(管叔), 채숙(蔡叔)과 난을 일으켰으므로, 성왕(成王:무왕 아들)이 주공(周公:단 무왕의 동생)을 시켜서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고 미자(은 주왕의 형)를 송()에 봉하여 은의 후대를 잇도록 했다.


6)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나는 『송()』에 의거하여 설()의 사적(事跡)을 순서대로 정리하였고, 성탕(成湯) 이후의 일은 『서()』와 『시()』에서 취했다. 설의 성은 자씨(子氏)였으나, 그 후대가 여러 제후국으로 나뉘어 봉해졌으므로 각기 자기 나라의 이름을 성()으로 삼게 되어 은씨(殷氏), 내씨(來氏), 송씨(宋氏), 공동씨(空桐氏), 치씨(稚氏), 북은씨(北殷氏), 목이씨(目夷氏) 등이 있게 되었다. 공자(孔子) '은나라의 제후들이 타고 다니던 로거(路車)가 가장 아름답다'라고 말했다. 은나라 사람들은 흰색을 숭상했다.

 

 

지금까지 인문학 TV 고경 이었습니다.

차기 예고

다음 편은 본격적으로 주본기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건국에서 초기 왕권 확립을 도운 인물들(주공단, 강태공 여상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다음편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