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사마천 사기 고조본기5부

팡씨1 2020. 8. 8. 22:25

1. 초한전쟁의 종결 (유방의 천하 통일)

한신과 팽월의 군이 가세한 한나라 유방은 단번에 세력이 커져 초나라 항우를 상대로 유리한 처지에 서게 되었고 사태의 추이를 파악한 다른 제후들도 유방에게 가담하면서 항우를 해하까지 결국 몰아붙였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항우와 초 병사들의 저항은 거세었고 한군은 연일 크게 희생했으므로, 장량과 한신은 무리하게 공격하는 대신 포위한 상태에서 보급을 차단하는 공격으로 초군을 서서히 붕괴시켰다. 항우는 남은 소수 군사를 데리고 포위망을 돌파했지만, 초로 도망치기 보다 한의 대군과 싸우다 해하전투에서 패하고 동성까지 물러나 결국 뒤를 쫒은 관영의 장수들에 의해 스스로 자결한다. 항우를 쓰러뜨린 유방은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魯)현의 항복도 받아내고 잔당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노현 곡성에서 항우를 후하게 장사지냈다.

 

2. 황제로 등극한 유방과 공신에 대한 분봉 

기원전 202년, 유방은 군신에게 추대받으면서 황제에 등극한다.

논공행상에서 전장에서 공이 있는 조참을 제일로 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유방은 듣지 않고 소하를 제일 공신으로 세운다〔실패만 거듭했던 유방은 소하가 늘 준비한 병력과 물자가 없었으면, 옛적에 멸망했을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한신을 초왕(楚王)에, 팽월을 양왕(梁王)에 봉했다. 장량에게도 영지 3만 호를 주려 했지만 장량은 이를 사양했으며, 유방을 배반하고 위구에 가담하는 등 거병 때부터 유방을 계속 방해하다 마지막에 또다시 태연히 한중 진영에 가담하는 등 유방의 눈에 죽이고 싶은 만큼 미웠던 옹치를 맨 먼저 십방후(什方侯)로 삼았다. 이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누르고 반란하지 않게 하려는 장량의 계책으로, 다른 제후들에게는 '(유방이 그토록 미워하는) 옹치에게도 상이 주어졌으니 나에게도 제대로 된 은상이 내려지리라'라고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3. 수도 천도 낙양에서 관중의 장안으로 

유방은 처음에는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으려 했지만, 제나라 사람 유경(劉敬)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할 때의 이점을 말하고 장량도 추천하자 장안을 즉시 수도로 정했다.

 

4. 유방이 항우를 누르고 천하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유방이 가신들과 함께한 주석에서 "짐은 천하를 잡고 항우는 천하를 잃은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고 이것에 대답해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항우는 오만하고 사람을 경시하지만 황제는 인자하게 사람을 사랑했으며 폐하는 공이 있으면 아낌없이 영지를 주어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나누었고 항우는 현명한 자를 시기하며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은상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잃은 이유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유방은 "귀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짐은 장량 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 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또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에 있어서는 한신 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짐은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아는데 항우는 단 한 사람, 범증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짐이 천하를 잡은 이유다."

라고 대답해 군신들이 감복했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출신 성분이 비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재를 중용할 줄 알았던 유방이 출신 성분도 좋고 출중한 전투 능력을 앞세웠으나 백성에게 무자비했던 항우를 이긴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5. 한나라 초기 정국 안정을 위해 모반과 반란을 잠재우는 토벌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초기에는 봉건제와 군현제를 조화시킨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그 해 7월,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반란하자 유방은 이를 친정하고 친구 노관을 연왕으로 삼는다. 유방의 신하들 중에서 한신과 팽월, 영포 세 사람은 영지도 넓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전투를 경험한 노련한 무장으로 한나라를 오래 이끌어 나가야할 유방에게는 특히 위험한 존재였다. 한신이 반란을 기도한다는 중상모략이 들어오자, 마침 한신을 질투하던 신료들은 이를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진평은 군사를 다루는 데 귀재인 한신과 정면승부는 위험하다면서 꾀로써 잡자고 제안했다. 유방은 이를 수용해 자신의 순행을 핑계로 한신도 오게끔 하고서 숨어 있던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온 한신을 붙잡아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이듬해 흉노(匈奴)의 공격으로 항복했던 한왕 (韓王 信: 회음후 한신과 동명이인)이 그대로 반란했다. 유방은 이것을 또다시 친정해 항복시켰다. 그 이듬해인 기원전 200년, 흉노의 묵돌 선우(冒頓單于)를 토벌하고자 더욱 북으로 군을 움직였으나 묵돌 선우는 약한 병사를 전방에 배치해 패배한 척 후퇴를 반복했고 추격을 서두른 유방군의 전선이 길어진 가운데 유방은 그만 소수의 군사와 함께 백등산(白登山)에서 묵돌 선우에게 포위된다. 7일간 음식도 없이 궁지에 빠졌던 유방은 진평의 책략으로 묵돌 선우의 연지(왕비)에게 뇌물을 주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백등산의 싸움〕. 그 뒤 유방과 묵돌 선우는 흉노를 형, 한을 제로 하는 형제 맹약하고 매년 조공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이후 한이 흉노를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