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세가(1부)
공자를 아십니까?
사생아 공자
공자와 제자간 말싸움
정치계에서 팽당한 공자
방랑자도 아닌 것이 유랑을 떠나다.(당 갈아타기위해 철새가 된 공자
대학 총장이 된 공자
공자세가(孔子世家): 1부
(주요 목차 내용)
공자의 출생과 유년
공자와 노자의 만남
공자와 제나라 안영의 만남
벼슬을 포기하고 제자양성에 주력
(서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사마천 사기 세가에 실린 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사마천이 기록한 역사서 중 사기세가 30편에는 원래 주나라 제후국들의 제후 또는 왕 그리고 한나라시대 외척과 황실자제들 그리고 한나라 공신들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중에 유독 제후도 아니고 왕도 아니고 건국 공신도 아닌 딱 두 사람이 세가에 기록 되어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진나라 말기 봉기를 주도한 진승 진섭세가가 있고요. 두 번째 사람이 바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 공자세가 즉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사마천이 제후도 아닌 공자를 세가편에 기록 했다는 것은 그만큼 공자의 위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우리가 지금도 주나라 제후국들의 제후 또는 왕을 모두 기억 하지 못하지만 공자만큼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공자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공자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를 통해 공자 언행과 사상을 배울 수 있었고, 공자를 서양 철학의 대표자 소크라테스처럼 동양의 위대한 철학자로 알고 있죠. 한편 우리가 막연히 느끼는 것이지만 조선시대 유교를 숭상하던 일 때문에 오히려 공자맹자 사상을 고리타분하다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분들도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공자와 유학사상은 오히려 중국 공산화 시대에 더욱 괄시 받던 학문이자 철학이었죠. 하지만 이제 세계의 영향력 있는 국가로 재 성장한 중국은 이제 공자를 다시 부활 시키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공자는 제후나 왕후장상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공자는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라는 벼슬을 지냈지만 봉지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공자는 일생의 대부분을 평민에 가까운 사(士) 계급으로 지낸 인물입니다. 사마천은 그런 공자를 위해서 세가에 넣었습니다. 공자의 사상, 학술, 문화, 교육 등은 여러 방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펼쳤고, 그 학문이 오래 전수되어도 쇠퇴하지 않고, 후세에 유가에 의해 받들어졌기 때문에 사마천은 공자를 세가에 포함시켜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서 기록했다고 스스로 밝혀둡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시작해서 약 여섯 편으로 나눠 공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 첫 시간으로 공자의 출생부터 노나라에 인접한 제나라에 가서 유세하던 내용까지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본론)
(공자 출생의 비밀)
공자는 노나라의 창평향(平昌鄕: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동남)에서 태어났다. 원래 공자의 조상은 노나라가 아닌 송나라(은나라 후손들) 사람이었는데 송나라 내란에 의해 좌천되고 결국 공자의 증조부인 공방숙(孔方叔)이라는 사람이 노나라로 망명을 해서 노나라의 대부가 되었다. 공방숙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공자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흘(紇 나이 60 본처는 시씨 아들 1명과 딸 아홉을 둔 사이)은 노나라 무사 이었고 안징재(顔氏집 새째 딸)와 야합(野合 :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가 아니라는 설. 정식으로 결혼은 했지만 그 것에 요구되는 예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설. 두 사람의 연령 차이가 너무 큰 결혼이라는 설 등)하여 공자를 낳았다. 안씨는 공자를 낳기 전에 사동성 곡부 니구산(尼丘)에 올라 기도(祈禱)를 올려 낳은 아이가 공자다.
공자는 노양공(魯襄公) 22년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머리의 정수리 가운데가 움푹 파져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 지었다. 자는 중니(仲尼 : 공자에게는 맹피(孟皮)라는 이모(異母) 형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자에 둘째를 의미하는 중(仲)을 넣었다.)이고 성은 공(孔)이다.
공구(孔丘)가 태어나고 세살 때 그 부친 숙량흘이 죽어 방산(防山)에 묻었다. 방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었다. 자라서 철이든 공자는 부친의 묘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 했으나 모친은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 사회 풍습으로서 그녀가 죽은 남편의 장례행렬을 끝까지 따라가는 행위는 무리였다. 그런 이유로 징재는 남편의 묘가 어디 있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있었고 따라서 공자에게 그 부친의 묘가 있는 위치를 알려줄 수 없었을 것) 어린 공자가 소꿉장난을 할 때는, 항상 조두(俎豆 제사를 지낼 때 희생을 바치는 제기(祭器))를 늘어놓고 예를 갖추어 제례를 올렸다. 공자 나이 16세에 모친 안징재가 죽자 부친의 묘를 알지 못해 임시로 노성(魯城)의 큰 대로 옆에 있는 오부지구(五父之衢)라는 곳에 빈소를 차렸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부부는 죽으면 반드시 합장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몰랐던 공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염을 하고 입관은 하였으나 매장하지 못하고 임시로 빈소를 마련했다가 그 부친의 묘소를 추읍(郰邑) 사람 만보(輓父)의 모친이 공자의 아버지 묘가 있는 곳을 알려주어 알게 된 후에 비로소 합장한 것이다.)
(당시 노나라의 삼환씨 전횡)
공자가 때 노나라 대부 중 계씨(季氏)에 대하여 : 당시 노나라의 국정을 좌우했던 삼환씨(三桓氏) 중의 한 가문인 계손씨(季孫氏)를 지칭한다. 삼환씨는 계손씨 외에 숙손씨(叔孫氏)와 맹손씨(孟孫氏)를 말한다. 노나라 환공이 제나라에 문강과 같이 들렸다가 제양공에 의해 살해 당했는데 노나라 환공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다. 노나라 후(魯侯)의 자리를 잇게 된 적자 노장공(魯莊公) 외에 배다른 형 공자경보(公子慶父: 맹손씨), 경보의 친동생 숙아(叔牙: 숙손씨), 장공과 어머니 가 같은 동생 계우(季友:계손씨)가 있었다. 후에 세 사람의 후예인 삼환씨들은 서로 작당하여 노나라의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노나라 제후(공실)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계손씨들의 가신인 양호(陽虎)에 대하여 : 계손씨의 가신으로 계평자(季平子)를 받들었고, 계평자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노나라의 국정을 전단했다. 노정공(魯定公) 5년 기원전 505년, 계손씨들의 적자인 계환자(季桓子) 사(斯)를 붙잡아 감금하고 자기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노정공 8년 기원전 502년, 삼환씨(三桓氏)들의 적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사이가 좋은 그들의 서자들을 대신 세우려고 란을 일으켰으나 삼환씨들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지고 공실의 보물들과 대궁을 가지고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동남쪽에 있던 양관(陽關)으로 도주했다. 노정공 9년 기원전 501년 다시 삼환씨들의 공격을 받아 제나라로 도망갔다가 제나라에 의해 체포되어 노나라오 호송되던 도중에 탈출하여 당진으로 도망가 조간자(趙簡子) 앙(鞅)의 가신이 되었다.
공자가 아직 상중에 있을 때 계씨들이 노나라의 유명인사들을 초청하기 위해 잔치를 베풀자 공자도 참석하려고 했다. 계손씨들의 가신인 양호가 공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계씨들이 잔치를 여는 목적은 노나라의 명사들을 위해서이지 공구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에 공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갔다.
공자가 17세 때 즉 기원전 535년 노나라 대부 맹리자(孟釐子: 맹리자는 노소공(魯昭公)과 함께 초나라에 갔다가 공식석상에서 상례(相禮)를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 노나라에 귀국해서 그의 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특별히 당부하여 공자로부터 예(禮)에 대해 공부하라고 명했다.) 맹리자가 병이 들어 임종시에 그의 후계자인 아들 의자(懿子)에게 당부하는 말을 합니다.
(공자의 선조들에 대한 내용)
「공구(孔丘)는 송나라에서 멸족된 성인(聖人)의 자손이다.
불보하(弗父何)에 대하여 : 서주 때 송나라 공족. 공자의 선조이다. 송민공(宋愍公)의 장자이며 송려공(宋厲公)의 동복형이었다. 민공이 죽을 때 군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동생 자희(子熙)에게 물려주었다. 자희가 양공(煬孔)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송민공의 차자 부사(鮒祀)가 양공을 시해하고 형 불보하를 추대하려고 했으나 불보하가 받아들이지 않았음으로 부사가 군위에 앉았다. 이가 송려공(宋厲公)이다. 송려공은 불보하를 상국으로 임명하여 송나라의 국정을 맡겼다.
공자의 조상인 볼보하는 원래 송나라 군주의 적자였으나 그의 동생인 려공(厲公)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정고보(正考父: 불보하의 증손자이며 공보가의 부친) 때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으로부터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했으며 그래서 정(鼎)에 세겨 넣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절을 한 뒤에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가운데를 걷지 않고 담장 곁에 붙어 다녔으나 아무도 감히 그를 경멸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鼎)에 ‘풀과 죽을 쑤어 먹으며 청렴하게 살았다’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공구의 선조들은 청렴하고 공손했다. 내가 듣기에 성인의 후손들은 군주의 자리에 앉지는 못해도 필시 귀한 신분에 이르는 자가 있다고 했다. 오늘 공구(孔丘)가 비록 나이가 어리다 하나 예법을 좋아하니 그 자가 바로 귀한 신분에 이르게 될 사람이 아니겠는가? 내가 죽게 되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
맹리자가 죽자 의자(懿子)와 남궁경숙(南宮敬叔: 맹리자의 아들이며 의자(懿子)의 동생)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
(계손씨 중 계무자와 계평자에 대하여)
이 해에 계무자가 죽고 계평자(季平子)가 계손씨들의 종주 자리에 올랐다.
계무자(季武子)에 대하여 : 양공 11년 기원전 562년 원래 이군(二軍)이었던 노나라 병력을 삼군(三軍)으로 만들어 삼환씨들이 각기 일군씩 갖도록 했다. 계손씨들에 속한 식읍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자유민으로 만들었으며 병역에 응하는 자에 대해서는 부세를 면제해 주고 병역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 세금을 배가시켰다. 양공 19년 기원전 554년 당진의 평공(平公)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같이 종군하여 노획한 병기와 종(鐘)에 노나라가 세운 공로를 새기게 했다. 후에 노양공이 국내를 떠나 있는 틈을 타서 변대부(卞大夫)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구실을 삼아 변읍을 습격하여 계손씨들의 사읍으로 만들었다. 양공이 알고 계무자를 매우 원망했다. 양공이 죽자 그는 소공(昭公)을 노후의 자리에 앉혔다. 노소공 5년 기원전 537년 그는 노나라 공실이 갖고 있던 중군(中軍)을 폐하고 공실을 4분하여 계손씨가 2분을 갖고 나머지 2분을 맹손씨와 숙손씨에게 각 1분씩 나누어 주었다. 이후로 노나라의 공실을 더욱 쇠약해 지고 계손씨가 전권을 휘둘렀다. 노소공 7년 기원전 535년 병으로 죽고 시호를 무자(武子)라 했다.
계평자(季平子)에 대하여 : 계무자의 손자이다. 그의 부친 계도자(季悼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무자(武子)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노나라의 정경이 되어 노나라의 국정을 독단했다. 노나라의 백성들은 그 군주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어서 군사를 일으켜 거(莒)나라를 정벌하여 잡은 포로를 박사(亳社)에 제사를 올리는데 희생(犧牲)으로 썼다. 후에 노나라 공실 출신들인 후(郈)씨 및 장(臧)씨들과 다투다가 노소공(魯昭公)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숙손씨와 맹손씨들의 도움을 받아 노소공을 나라밖으로 쫓아냈다. 이어서 당진의 육경(六卿)들에게 뇌물을 바쳐, 당진이 노소공을 노나라에 귀국시켜 군주의 자리에 복위시키려는 기도를 막았다. 결국 노소공은 계평자의 방해로 나라밖에서 유랑하다가 객사했다.
(공자의 첫 공식적 직업)
출신이 가난하고 천한 공자가 장성하게 되자 계손씨들의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 관리가 되었다.(공자 21세 BC531) 그의 저울질은 공평하였고, 목장의 말단관리가 되었을 때는 가축들은 번식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사공(司空: 토목과 건축을 관장하던 관리의 장)의 직에 발탁되었다. 하지만 말단 관리 일을 하느니 차라리 노나라를 떠나 유세를 해볼려고 했다. 하지만 제(齊)나라에 가서는 배척을 받고, 이어서 송(宋)나라와 위(衛)나라에 차례로 갔으나 모두 쫓겨났다.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난관에 빠지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아직 공자의 능력으론 받아 줄만한 곳도 없고 춘추국들 간의 대립은 공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공자는 키가 9자 6치(춘추 때 대척과 소척이 있었으며 대척은 한자에 22.5cm에 10치에 해당하고 소척은 18cm에 8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공자의 키는 대척으로 말한다면 2m 16cm이며 소척으로 말한다면 175.5cm이다. 공자의 키는 소척으로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가 되어 사람들은 모두 그를 키다리(長人)이라고 부르고 그의 큰 키를 기이하게 여겼다.(175cm가 큰키면 옛 사람은 지금보다 평균키가 작았다는 예긴데..) 공자가 노나라에 다시 돌아온 이유는 아무래도 고향 노나라 사람들이 잘 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노자를 만난 공자. 따끔한 훈계를 듣다)
노나라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노후(魯侯)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려고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노후가 공자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필, 시종(侍者) 한 명을 주어 노나라에 가게 하여 예에 대해 묻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노자(老子)를 만날 수 있었다.(공자33세 BC519) 이윽고 공자가 헤어지려고 할 때 노자가 전송하며 말했다.(노자한비열전 참고)
「내가 듣기에 부귀한 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 재물로써 하고 어진 사람은 사람을 전송할 때 말로써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부귀하자 못하나 어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그대를 말로써 전송하고자 합니다. ‘총명하고 주도 면밀한 사람들은 항상 죽음의 위험이 따라다니는데 이는 다른 사람과 다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박학하며, 언변에 뛰어나고, 식견이 넓은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로운데, 이는 남의 나쁜 점을 들쳐 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녀 된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항상 자기 부모를 마음속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남의 신하 된 자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공자가 주나라에서 노나라에 돌아오니 그 뒤로 제자들이 더욱 늘어 났다.
(당시 노나라를 둘러싼 주변 정세)
그 당시 당진의 평공(平公)이 음탕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권을 전횡하고 있던 육경(六卿)이 동쪽의 제후들을 공격하였다. 또한 초영왕(楚靈王)이 강한 군사들의 힘을 믿고 중원의 제후국들을 넘봤다. 대국 제나라는 노나라와 이웃하고 있었다. 노나라는 소국에 국력이 미약했으므로 초나라에 붙으면 당진이 화를 냈고, 당진에 붙으면 초나라가 군사를 내어 공격해 왔으므로 미처 제나라에 대한 방비를 할 틈이 없었다. 제나라는 이것을 노리고 이윽고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쳐들어왔다.
(제나라 경공과 공자의 만남: 진목공이 훌륭한 이유?)
노소공 20년 기원전 522년은 공자의 나이 30세 때다. 제경공(齊景公)과 안영(晏嬰)이 사냥하러 국경 근처에 나왔다가 노나라에 왔다.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섬진(陝秦:섬서성의 진)의 목공(穆公)은 변방의 작은 나라 군주에 불과했음에도 어떻게 해서 그가 패자가 될 수 있었소?」
공자가 대답했다.
「섬진 목공은 비록 소국의 군주였지만 그 뜻이 원대하였고, 그 나라는 비록 중원과 멀리 떨어진 변방에 위치했지만 정도를 행했습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초나라에 도망쳐 살고 있던 백리해(百里亥 : 백리해는 원래 우(虞)나라 사람이었으나 당진이 우나라를 멸하자 그는 당진의 포로가 되어 진목공에게 시집가는 목희의 노비가 되었다. 목희의 행렬을 따라 당진으로 가던 도중 탈출하여 초나라의 완(宛) 땅을 지나다 초나라 사람들에게 잡혀 소를 기르는 목부가 되었다.) 후에 섬진의 목공이 백리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숫양피 가죽 5장을 속죄금으로 내고 (그런 이유로 백리해는 오고대부(五羖大夫)라 고 불렸다..) 섬진으로 데려가 그와 3일 밤낮을 서로 대화를 나누어 본 후에 대부에 봉하고 섬진의 정사를 맡겼습니다. 목공은 그러한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천하도 얻을 수 있었지만 단지 패자(覇者)에 머물렀으므로 별것도 아닌 일입니다.」진목공의 위업이 별것도 아닌 것이란 말을 들은 제나라 경공은 속으로 기뻐합니다. 자기도 패자 가능성 있다는 것을 기대한 거죠.
(제나라에서 예법만 따지다 내쳐진 공자)
노나라 소공 25년 기원전 517년으로 공자 나이가 35세 되는 해이다. 그 해에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郈昭伯 : 계손씨를 미워 했던 조나라 대부)과 투계(鬪鷄)를 하다가 소공에게 죄를 얻었다. 노소공 역시 계손씨가 노나라의 정권을 전단하는데 원한을 품고 있다가 후소백을 도와 공실 군사를 동원하여 계평자를 공격했다. 이에 계평자는 맹손씨 및 속손씨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가문 병력을 합쳐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이 싸움에서 지고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나라는 소공에게 건후(乾侯 : 지금의 하북성 성안현(成安縣) 동남에 있던 땅으로 춘추 때 당진(唐晉)의 땅. 사마천이 잘 못 이해한 지역 사실은 제나라의 운(鄆) 땅)를 주어 살게 했지만 얼마 후에 노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이때 공자는 제나라에 가서 고소자(高昭子: 제나라 정경 (正卿))의 가신이 되어 경공에게 호소하여 노나라 소공을 복위시키려고 했다.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에 대해 토론하다가 『소(韶: 순임금이 지어 전해졌던 고대의 악곡)』 라는 음악을 듣고 그것을 배우는 3달 동안은 고기 맛을 잃을 정도로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이 공자를 칭송하였다.
(-. 제 경공과 공자의 대화. 공자를 경계하는 제나라 재상 안영)
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신하는 신하다워야,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君君臣臣父父子子) 」
제경공이 말했다.
「옳은 말입니다. 만약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양식이 있다한들 내가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 후에 경공이 다시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다시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란 재화를 아껴 쓰는데 있습니다.」
경공이 기뻐하며 장차 공자를 니계(尼谿)의 땅에 봉하려고 했다. 그러자 제나라 재상인 안영(晏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유자(儒者)는 말재간이 좋아 법규(法規)를 준수하지 않으려 하며, 오만하고 불손하여 무슨 일이든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밑에 두고 쓰기 어렵습니다. 상례를 중시하며 오랫동안 슬픔을 멈추지 않고, 과다한 장례비용으로 재산을 축내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습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여러 곳에 유세를 다니며 관직이나 록만을 구하는 그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성인들이 사라진 이래로 주나라 왕실의 도가 이미 쇠해졌고 예약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 공자의 행색을 보니 몸치장을 성대히 꾸미고 절차를 번잡스럽게 할 뿐 아니라 세세하게 강요하고 있는 행동규범은 몇 세대를 거쳐도 다 배우지 못할뿐더러 평생 동안 연습을 해도 공자가 추구하는 예법을 터득할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 공자를 임용하여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제나라 백성들을 이끄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결국 제경공은 안영의 말에 공자를 임용하지는 않았으나 예전처럼 공경 했고, 더 이상 예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공자를 불러 말했다.
「내가 그대를 계손씨와 똑 같이 상경(上卿)에 해당하는 대우를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었소!」
이후로 경공은 공자를 계손씨의 상경과 맹손씨의 하경(下卿) 사이의 지위로 대우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나라의 대부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공자가 알았다. 이 때 경공은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너무 늙어 그대를 쓸 수가 없소!」
그래서 결국 공자는 행장을 꾸려 제나라에서의 위험을 피해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 37세)
(마무리)
사마천은 공자가 활동한 시대보다 약 400년 후대 사람입니다. 사마천은 공자가 쓴 책을 읽어보고 공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상상해 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나라 공자를 모신 사당까지 가보고 공자가 쓰던 수레, 의복, 제기 등 여러 유물을 보았는데 공자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과 공자에 대한 경외감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첫 시간 공자가 아직 40대 불혹이 되기 전까지의 생애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평민의 신분으로 태어나 집안의 도움 없이 자라난 공자가 세상에 나와 뭐라도 큰 일을 해보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다음 회 예고)
그러면 다음 시간에는 제나라에서 돌아온 공자가 제자 양성에 힘쓰다가 제나라 경공이 노나라 정공을 시해하려는 것을 막은 일과 노나라에서 대사구까지 올라 노나라를 좋게하려 했지만 계손씨의 전횡에 단념하고 더 큰 대의를 찾아 다시 노나라를 떠나게 되는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인문학 Tv 고경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