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전운
1. 지난 이야기 개괄 (이순신의 전과와 승진과 파면)
2. 오늘 이야기 범위 전운 (임진왜란 발발전 5년전부터 조선의 상황과 일본의 동태)
3. 1587년 D-5년
가) 남해안 왜구의 침입과 조선군 대응의 문제점 - 임진왜란의 서곡 당시 이순신은 조산보 만호로 근무중이었고 8월에는 두만강 하구 녹둔도 둔전까지 책임지역에 포함되었다.
나) 2월) 대마도주가 표류한 조선인 4명을 귀환시키자 조정에서는 표창을 검토한다. 반면 고흥군 흥양에 왜구 배 18척이 침입하여 권관 이대원이 전사하자 방어사로 신립을 파견한다. 같은 달 가리포(완도)에 왜구가 나타나 전선 4척을 약탈하고 첨사 이필이 왼쪽눈에 화살 맞고 퇴각한다. 이때 왜구는 아예 손숙도(고흥 앞바다 섬)를 점령하고 진을치고 남해 섬들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정찰, 무기관리, 군사지원등 모든 대비책을 마련하라 조정에 지시한다. 하지만 돌아온 보고 내용은 허무할 정도로 미약하다. 왜구를 막기위한 뽀족한 계책은 없고 그저 주의하고 만전을 기하는 수 밖에 없다는 둥, 아마도 왜구가 노리는 곳의 방어책이 있을 것이고 이미 조치를 했을 것이라는 둥, 무기는 잘 모관 중이고 단지 갑옷이 좀 부족한데 지금 막 만들고 있을 것이라는둥... 대응책에 대한 보고가 모두 추즉성 보고이며 막연하고 진부한 내용 뿐이었다. => 한 마디로 주먹구구식 대비책을 세워 보고하니 대비책의 실효성은 없었다.
다) 3월) 선조가 말하길 군대는 숫자보단 군기라며 왜구와 싸운 좌수사 심암을 문책한 결과를 말한다. 심암이 왜구와 싸우고도 왜구에 대한 정보도 없고 진술도 못하니 그 부하들을 조사하라 명한다. 조정에서는 "부장들을 조사 했더니 그들도 모른다고 합니다"라는 식으로 보고한다. 선조가 이를 보고 받고 군대 무기와 진지를 점검하고 군기를 다지고 봉화등도 점검하라 명했다. => 한마디로 군사 보고 체게도 엉망임을 드러내고 있는 대화다. 선조가 왜구와 싸우다 피해본 사람에 위무책을 강구하라 하니 신하들 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며 조정 신하들은 수동적으로 대응한다. 비변사가 보고하기를 심암은 왜구가 이대원을 죽이는 것을 눈앞에 보고도 지원하지 않았고, 우수사 원호는 가리포를 침략한 왜구를 쫓지도 않았다고 보고하자 열 받은 선조는 옛 중국 초나라가 강성했던 이유는 부패하고 무능한 장수를 일거에 단죄했기 때문이라며 군사 1천명을 잃고도 왜놈 머리하나 얻지 못한 심암을 효수하라 명하고 서울로 압송하여 4/4 형장서 처형함.
라) 6월) 심암의 후임으로 전라 좌수사로 발령 받은 이천은 군기 확립을 빌미로 소집통보에 늦게 도착한 보성군수 이흘에게 형장을 치다가 그가 죽는 사건이 발생 된다. 당시 전라감사 한준과 비변사가 조사한 결과 너무 과한 처사로 이천을 문책 할 것을 보고하자 선조는 그런 일로 이천을 처벌 할 수 없다며 거절 한다. (군기강 이천을 두둔한 선조) 이어 사헌부에서 흥양에서 이대원이 죽을때 순천까지 도우러 출동 했던 전라감사 한준이 왜구가 강하다는 말을 듣고 도중에 도주해 버렸다고 보고하자 선조는 한준을 파면 시키고 전라감사로 윤두수를, 전라병사로 성응길을 임명한다.
마) 7월) 전라감사인 윤두수가 좌수사 이천의 부장들을 형장을 쳤다. 그리고 전라 좌수사 이천이 백성의 민심을 잃었으니 교체해 달라 건한다. 하지만 이천은 윤두수가 개인적 감정때문에 자기 부하를 형장쳤다며 장계를 올렸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윤두수에게는 죄를 묻고 이천에게는 과오를 추궁했다. => 조선 장수들끼리 서로 아웅다웅 싸우고 난리...이러니 군기가 살겠는가? 제주인이 표류되어 대마도에 도착하자 대마도주가 등원주창 이라는 자를 시켜 조선에 돌려보내자 조정에서 그에게 벼슬과 포상을 주었으나 맘에 들지 않는 다며 등원주창이란 자가 집어 던지고 돌아갔다 (쪽발이 근성)
바) 8월) 녹둔도에 오랑케 침입으로 조선군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은 사력을 다해 대응 했다. (끌려가던 포로 60명 구출, 말 한필 회수, 적장 사살 등등 : 잃은 것은 조선 106명 포로, 말 15필, 10명군사 사망) 9월) 패배의 책임을 상관인 이일이 두 장수에게 덮어 씌우자 이순신은 녹둔도에 군사 보충을 요청 했지만 무시한 것은 당신이라며 반발하며 자술서를 쓰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일인은 선조에게 이순신을 패장이라며 처벌 할 것을 장계로 올린다. 10월) 하지만 선조는 싸우다 패배한 것과 경우가 다르다며 형장을 치고 백의종군하게하여 스스로 죄를 씻도록하라는 명을 내린다. => 이일은 추후 임진왜란 초기 상주 전투에서 대패하고 충주까지 달아나는 무능함을 보인 장수가 된다.
사) 이시점 일본의 상황 전년도인 1586년 : 일본 관동 지역 대부분을 차지한 풍신수길은 군대를 증강시키고 침략을 위한 전함을 대규모로 건조하기 시작한다. 포루투칼 신부에게 서양전함을 구매할 수 있도록 부탁 했으나 실패하자 코엘료 신부가 타고온 서양 전함을 구경하면서 신부에게 "내가 앞으로 명나라와 조선을 침략 할 것이다"라며 공공연하게 말한다. 1587년 : 당해년 풍신수길은 관동을 이미 평정 했고 마지막 남은 규슈를 6월에 공략하여 일본 전역을 통일하게 된다.
아) 10월) 대마도주가 본국 사신이 조선에 도착함을 알리자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국왕을 내몰고 새 임금이된 자가 보내는 사신은 맞을 수 없다'며 거부한다. 하지만 선조는 '영접은 하되 사신을 맞는 상대자의 벼슬의 높낮이를 따지기 보다 뛰어난 문장가를 보내 시를 지어주고 꿀리지 않게 하라' 명한다. 이에 이조 정랑 유근을 왜 사신을 맞이하는 상대로 임명하여 맞게 한다.
자) 11월) 북병사 이일이 오랑케 수급 33명을 보냈다. 조정에서는 포로가 된 조선인을 도와서 탈 출 시켜준 오랑케를 포상하자고 건의 한다. 이 소리를 듣고 선조는 '자꾸 포상해주니까 오히려 물에 빠뜨린 놈이 다시 구해주고 칭찬 받는 격'이라며 오랑케 포상에 대해 승정원에 대책을 세우라 말하니 승정원이 옳다며 비변사에 대책을 강구하라 전한다. => 주먹 구구식 대응책을 올리는 무능한 조정 신하.
차) 12월) 일본 사신으로 온 귤강광이 연회에서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해 달라 요구를 한다. 그리고나서는 지난번 온 사신은 매를 선물로 받았다는데 '나도 매를 좀 선물로 주쇼'하고 요구하니 선조가 이를 듣고 " 알겠다 매는 선물로 줘라" 말하고는 통신사 파견 건은 거론도 하지 않았다. => 건방진 일본 사신의 태도..(예나 지금이나 같은 일본)
4. 1588년 D-4년
가) 이순신은 : 1월 시전부락 전투의 공으로 백의종군에서 복권 6월부터는 장기휴가를 간다.
나) 북병사 이일의 보고 : 녹둔도를 침범한 오랑케를 시전부락에서 대파 시켰다는 보고 내용에 수하 부장들의 공은 전혀 기록 없시 보고함. (이순신 복권) => 공을 독식하려는 속셈 '패하면 부하 탓 승리하면 자기 공' 여러분 주변에 이런 인물 곡 있죠?
다) 포상 받은 오랑케 귀향 : 비변사에서 시전부락의 오랑케중 조선인을 구해준 이유로 한성에 와서 포상 받은 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자기 마을이 전소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발할 것이니 제주도로 귀향 보내자 건의 => 선조 승락(1월) => 왜구는 신경 안쓰고 심각성이 덜한 것에 다 관심을......
라) 후추 사건 : 일본 사신 접대 연회에서 일본 사신이 기생과 악공에게 후추,단목,면피등을 주었더니 서로 가지려고 앞다퉈 다투다 사진 앞에서 쪽을 팔린것에 대해 준비한 예조 당상관은 추궁하고 당하관은 파면하라며 사헌부에서 건의 => 선조 승락(2월) (같은 죄에 고위직은 약한 처벌 하위직은 과한 처벌 '이런 샹! 욱!")
마) 조정 6조 참의 이상 회의서 일본에 통신사 파견 거부 결정 :(3월)
바) 때 늦은 포상 : 선조는 년초 시전부락을 공격하여 오랑케 소탕한 함경감사 이광과 북병사 이일에게 공에 대한 포상이 늦었다며 사람을 보내 연회와 치하를 해주고 그들의 집에 쌀 20섬을 보내 줬다.
사) 신립의 파면 : 남도 병사 신립이 부하 장수를 모욕한 군사를 목베자 사간원에서 전시가 아닌데도 군기 확립을 이유로 부하의 목 벤것은 너무 과했다며 파면을 반복해 세번이나 올리자 선조가 마지 못해 승인 . 이일 역시 오랑케에 길잡이 안내를 한 조선인 병사 부자를 참형하고 난 후에 임금에 보고 했다며 파면시켰다. (10월) => 파면이 무슨 취미인지 난발하니 장수가 임금 눈치만 보게되지.
아) (정언신의 건의) : 장수들을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파면시키면 않됩니다. 지금 군 간부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아 노병인데다 장군들까지 파면 시키면 어렵습니다. 병조판서 정언신이 건의 하자 선조는 오히려 문관들이 비겁하게 어려울때 도망가기나하니 어찌하겠나...판서,신립,이일 등이 있어 현재로서는 버틴다지만 앞으로 그대들이 물러나고 나면 어찌 할텐가?... 심히 걱정이다. (함경 감사 권징의 건의 ): 이일은 오랑케도 두려워 하는 장수인데 갑자기 파면은 현지 사정으로는 합당치 않으니 철회하여 주소서 => 선조는 감히 지방관리가 임금에게 인사권에 대한 왈가불가는 불경한 짓이다. 하지만 오죽 급했으면 함경감사가 나에게 그리 요청 했겠는가. 이일에게 잘못은 깨우치되 일단 그대로 파면을 취소하고 머물게하라.(선조의 변덕도 이만저만) 11월
자) 진도 사람 사화동이 조선의 부역에 힘이들어 일본으로 넘어 가서 왜놈의 정찰병역할을 하고 작년(1587) 손숙도에 침입한 왜구를 안내 했다며 자랑질을 하자 손숙도 싸움때 왜놈에게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중국까지 갔다 명나라 수도에서 신문 받고 사신과 함께 돌아오게된 김개동이 증언하였다. 사화동이 머물고 있는 섬이 오도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조선인 포로가 많았고 배가 5백척이있고 조선에서 끌려간 매복선들의 무기들은 애들 장남감으로 사용중이더라.... 11월
차) 이광 전라 감사로 임명 (12월)
5. 1589년 D-3년
가) 1월) 비변사에서 계급을 무시한 등용할 만한 유능한 무관을 추천 요청 했다. :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추천 (특히 좌의정 이산해, 병조판서 정언신 추천했다.) 특이 사항으로 당시 49세된 원균을 추천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 선조는 7월에 이일의 무고로 백의 종군 했던 이순신과 이경록(제주 목사로)을 선택 등용하라 명했다.
나) 2월) 전라감사 이광의 종사관으로 이순신 발탁한다.
다) 7월) 조선 3도 충청,전라,경상 가뭄으로 흉년이 되었다.
라) 8월) 일본에서 지속적인 통신사 파견 요청 (사신 파견의 문제점 : 파견시 풍신수길 같은 자기 임금을 죽인 역적을 용인하는 꼴, 거부시 일본의 무력 동원 가능성에 대한 빌미 제공 염려, => 선조의 고안 명분) 선조의 대책 : "왜구가 통신사를 보내 달라하여도 뱃길이 험하다는이유로 거부 했더니 이제 대마도주 아들까지 보내며 뱃길을 안내하겠다하니 거부 할 수도 없고 이참에 작년(1597년) 풍신수길이 일본의 새로운 왕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인 들이 조선 남해 섬을 약탈하고 침범했으니 이는 그대의 수치다. 그 증거로 일본 섬 오도에 조선에서 넘어간 사을포동이라는 자가 입으로 왜구에게 조선의 뱃길과 지역을 가르쳐 줬다고 말했으니 그자를 묶어 보내고 끌려간 조선 백성을 풀어주면 뱃길이 험난하다 해도 그에 대한 사례로 조선 사신을 보내겠소."라고 전하면 이치에도 맞고 만약 그들이 거부하면 이는 그들의 잘못이다.'라며 조정에 사신 파견에 대해 검토하라 명했다. 그리고 선조는 같은 달 우의정 정언신과 신립 전라병사 이일을 불러 변경의 방비 문제를 의논하였다. (어느새 이일이 전라병사로 발령됨)
마) 9월) 조정의 종2품 이상의 관료들이 모여 통신사 파견을 토론했으나 이산해만을 제외하고 모두 통신사 파견키로 결정
바) 12월에야가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마지 못해 결정
사) 정여립 모반 사건 발생 (10월) 황해감사가 비밀 사항을 보고하자 삼정승과 여섯 승지만 참여하여 대책 회의를 하고, 전라도 정여립을 괴수 결론 짓는다. 정여립은 도피하다 결국 자결하고 그의 아들 옥남을 압송. 생원 양천회의 상소 : "가믐과 흉년으로 백성이 힘들다. 관청에서 세금은 더 띠고 도적떼는 많아지고.. 오늘날의 문제는 정여립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판이다. 그러니 백성을 위로하고, 국책공사 그만두고, 조세 감면, 민심 수습을 하시라" 이 글은 정여립과 대립각을 세웠던 정철이 사주하여 올린 글로 어려운 상황을 부추기고 문제를 키워서 정여립을 더욱 곤란하게 하고 그의 세력을 죽이려는 모략이었다. (기축옥사의 발단)
아) 이순신 선전관 겸직 (11월) 정읍현감에 임명(12월) 이순신은 두형이 죽자 조카들을 돌봄, 누군가 식솔이 너무 많다고 비난하자 이순신은 "내가 식솔을 많이 데리고 있는 (남솔죄) 죄를 지을 지언정 의지할데 없는 어린 조카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 말하니 주변 인들은 이순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여겼다. --행록에 기록
자) 통신사로 선발된 황윤길의 보고(12월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마지 못해 결정) 황윤길이 일본 사신 현소에게 '일본 국왕의 접대 절차와 풍토와 풍토병은 무었인가?' 묻자 현소가 대답하길 "접대 절차는 가서 알려주겠다. 그리고 풍토병은 조선이나 다를게 뭐 있겠나" 라며 건방진 답변을 내 놓았다. 역시 쪽발이의 조상 답다. 대마도주 종의지(평의지)가 선물로는 말과 매가 좋겠다고 추천하고, 당대 글의 대가 차천로를 동행하기로 보고하자 선조가 동의함. (정작 출발시 차천로는 명단에서 빠짐)
6. 1590년 D-2년
가) 이순신 : 7월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 임명후 취소, 8월 만포진 수군점철제사 임명후 취소 => 대간들의 반대 상소 때문
나) 만약의 변고에 대비해 병부를 세 짝을 새로 만들어 대신과 각도 감사 병사 수사에게 전달 (2월)
다) 3월) 통신사로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을 필두로 출발
라) 이해 풍신수길은 관동을 공격하여 정복하고 공공연이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고 호언장담 하며 본격적으로 배를 건조 하기 시작했고 오기나와 (유구국)이 조공 바치러 오자 그 바닷 길을 통해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고도 말했다. 또 중국을 배반한 중국인에게 중국 해안 정보도 확보한다. 그리고 스스로 "나는 중국의 황제가 되겠다"라 장담한다. 그리고 대마도주에게 시켜 조선에 일곱 갈래로 사람을 보내 지리와 지형 형편을 살피고 오게 한다. => 주도 면밀한 전쟁 준비를 하는 일본 풍신수길.. 지금 아베가 동일한 작태를 보임.
7. 1591년 D-1년
가) 2월) 이순신 진도군수 임명, 가리포진 수군 첨절제사 임명, 두 곳에 부임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됨.
① 왜군 침략 예견 이후 : 전쟁무기 정비, 방어 진지 정비, 병력 군량 확보, 전함 건조, 군사 훈련 실시.
나) 허준에 직위 대한 거부 움직임. (1월) : 선조가 정 3품의 품계를 내리자 벌어진 일 사헌부(지금의 행정기관)에서 허준이 왕자를 낮게 한 것은 인정하나 품계를 올리는 것은 가당치 않다며 반대. 사간원(왕에 대한 간쟁, 논박 등 제의)에서도 허준이 한 일은 당연한 직분이라며 분수에 맞지 않는 벼슬은 줄 수 없다며 불가 결정. (기술직 전문직을 무시하는 조선의 문관 제일주의 습성) 그래도 선조는 끝내 대간의 의견을 거부하고 조선 역사상 의원 신분으로 당상과 정 3품의 품계를 받는다.
다) 통신사 소식, 대마도 표류된 백성들
① 대마도에서 표류된 조선 백성 9명을 돌려보내 왔다. 그 대마도 사람들을 한양에 불러 접대했다. (1월)
② 통신사의 귀환 도중 편지 내용 : 통신사가 지난해 7월 수도에 들어가 11/7일 에서야 임금의 지시서 전달. 사포에서 기다리다 11/20일 답문의 문서를 받음. 문서 내용이 부당하여 고쳐 달라 요청하자 일본 사신부관 평신조가 받아서 고쳐 받아 오겠다며 떠났고, 수정 답장을 기다렸다 일본 사신 상관 현소와 함께 귀국 예정입니다. 편지는 대마도주 평의지에게 먼저 전합니다.
라) 원래 1월 말 윤두수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원균을 발령하였으나 사간원에서 전직 수령 일 때 업무평가에서 하등급을 맞은 원균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며 거부의사를 표시하고 지략가이며 젊은 사람을 발탁하기를 청원하자 선조가 받아들여, 2월에 결국 유극량으로 결정했지만 사헌부에서 유극량은 사람이 너무 유해서 부장들이 맘먹으려 하니 위급 시 통제가 어려 울 것 같다며 재 검토를 요청한다. 결국 동월 2월에 비변사에서 이순신을 건의하자 선조는 유성룡의 뜯을 받아 초특급으로 진급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2/15) 이때 선조는 이순신에게 비밀 병부도(임금과 병부 받은 장군만 통하는 비밀 전달 사항 증표) 함께 내린다. 이순신을 신뢰하는 선조. 그리고 왕의 명령 없이 군대 이동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근간. (임진란 초기 원균의 지원 요청에도 바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① 사간원에서 이순신의 초특급 승진은 벼슬 남발이라며 반대. 선조는 문제는 있어도 이순신의 자질과 능력으로 봐서 내가 그리 선택했으니 더 이상 벼슬이 높고 낮음에 대한 일을 따지지 말라 일축.
② 사간원에서 재차 이순신이 경력도 적고 그를 기대하기도 그렇고 아무리 인재가 없다 선 치고 일개 현의 관리를 수사까지 한방에 올려주십니까. 이건 요행수를 바라는 것 밖에 안됩니다. 라며 반박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교체할 수 있다면 진작 그리 했을 터 하지만 고칠 수 없으니 그리 알라!" 단호히 거절. 이때 선조가 이런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상상해 보시라.....
마) 통신사의 여정과 귀국
① 통신사 여정 : 1590년 3월 출발 대마도 4월 도착 (일본에서 격에 맞는 관리를 보내지 않음, 김성일이 이에 항의하여 한 달간 지체하고 출발 ) 대마도주 평의지가 산 위의 절에서 연회 하자며 지는 말을 타고 가고 조선 통신사는 걸어서 갔다. 열 받은 김성일이 연회에 불참 선언하고 황윤길은 참석. 이를 알게 된 평의지가 다음날 김성일에게 사죄. 이때 이후 왜인은 김성일을 깍듯이 대우함. 일본 측 안내자가 일부로 먼길을 돌아서 일본 수도 오사카성에 도착(쪽발이의 전형적 수작 지금도 변하지 않음) (중간에 왜장들이 악공 연주를 보여 달라며 요청해도 김성일은 임금님 편지도 전달하지 않았는데 이런 요구는 모욕을 당하는 꼴이니 그리 할 수는 없다며 강행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때 산동에 군사 출동 중이라 통신사는 그를 기다리게 되고 궁을 수리한다는 핑계를 대며 5달을 만나주지 않음. (쪽발이 근성) 당시 천왕은 있으나 실권은 관백이라 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독식중. 동행한 허성이 "관백을 만나 뜰에서 절해야 하나?"라고 김성일에게 묻자 "천왕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하고 현소와 상의하여 기둥 밖에 올라가서 하는 것으로 합의한다. 평의지가 김성일에게 '관백이 오기 전에 구경이나 하시지요' 권하니 김성일은 '지금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거절하였다. 황윤길과 허성은 선물 챙기느라 여러 번 행장을 바꾸고 있고 이를 본 김성일이 불손한 행동이나 한다며 일침을 가한다. 이렇듯 수행한 우리 통신사 사이에서 앙금이 있었다. 오죽하면 대마도주 평의지가 '김성일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겠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여러 차례 찾아갔다가 드디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처음 만나게 된 통신사는 그의 모습에 대해 귀국해서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생김새가 작고 볼품없으며 낯빛은 원숭이처럼 주름이 쪼글쪼글하고 눈은 풀 꺼진 것이 눈빛은 반짝 빛나며 쏘아보는 듯하였다"라고 전한다. 통신사를 맞은 수길은 연회도 없이 안주로 떡 한 접시에 탁주 한잔 놓고 대하며 예절도 엉망이었다. 얼마 후 우리 악공의 연주를 듣다가 어린아이(양자) 하나 앉고 있다 오줌을 싸니 웃으며 시중드는 여자에게 넘기고.... 수길이가 하는 짓을 보니 예의도 없고 격식도 없는 제멋대로 인간으로 평한다. 그 뒤로 두 번 다시 수길을 만나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 부 두 조선 사신에게 400냥을 주고는 조선 임금에게 전할 수길이의 회답 편지를 주지 않고 먼저 가라고 하니 김성일은 죽치고 기다리겠다 하고 황윤길은 억류될까 두려워 먼저 나가 숙소에서 기다렸다. 얼마 후 답 편지를 받고 보니 내용이 오만 방자하여 여러 차례 고치게 한 다음에야 받았다. 돌아오면서 왜장들이 주는 선물을 김성일은 모두 거절하고 왔다. 부산에 3월에 당도하고 조정에 올라가 보고 하기를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터질 것 같다"라고 보고하고 김성일은 "전란이 터질 기미는 없다 괜히 황윤길이 오버하여 불안만 가중시키려고 그렇게 보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선조가 수길의 모습에 대해 물 은니 황윤길은 "눈이 번쩍번쩍한 것이 담력과 지혜가 있어 보이더라"라고 하지만 김성일은 "눈은 쥐새끼 같아 무서워할 나위도 못돼 보입니다"라고 보고한다. 사실 김성일은 황윤길이 너무 겁먹고 체면 깎기는 짓을 해서 열 받아 어깃장 노은 것이다. 서인들이 황윤길의 생각을 지지하자 사람들은 힘이 약해진 서인이 동요가 일만 한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얼마 후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황 씨와 어긋나게 말한 이유가 뭔가? 그러다 전쟁이 나면 어찌하려고?"라며 묻자 김성일은 "나도 왜 놈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 장담 못한다. 하지만 온 나라가 놀라 동요하고 의혹이 일까 봐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할 따름입니다"라고 답한다. (훗날 김성일은 경상우도 관찰사로 진주성 김시민을 지원하고 의병을 지원하며 왜놈과 싸운다. 1593년 그는 진주에서 전염병에 감염되어 병사한다)
바) 핵심 정보를 보고하고도 파면당한 오억령 (썩은 조정 신하들의 모함) 통신사와 함께 돌아온 일본 사신 현소가 연회에서 홍문관 관리 오억령에게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치려하니 조선이 길을 좀 내주쇼"라는 말을 듣고 긴박함을 감지하고 조정에 보고 했으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안전 불감 등 만성병 들린 썩어 빠진 조정 신하들은 오억령이 괜한 소리를 한다며 그를 심희수로 교체하려 하였다. 그러자 오억령은 아예 조서로 써서 문서로 상소했다. 이후 그는 썩어빠진 조정의 신하들에 의해 파면당했다.
사) 시건방지고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 왜놈 사신 현소의 주둥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려니 길을 내어 달라는 왜놈 사신 현소와 평조신 김성일에게 현소가 "명나라와 외교가 오랫동안 끊겨 이번에 관백이 명나라에 조공을 하려 한다. 그런데 만약 명이 이를 거절하면 우리 일본은 수치스러워 명나라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이런 일본의 입장을 조선이 명나라에 먼저 전달해 달라. 일이 잘 이뤄지면 전쟁을 피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 백성도 싸움을 하게 되는 고통을 면하게 될 것이다?라는 싹퉁바가지 없는 개 같은 소리를 한다. ( 영원한 주적 1호는 일본일 수밖에 ) 김성일이 명나라와의 의리상 그리 할 수 없다 말하자 현소란 놈이 이번에는 "옛날 고려는 중국 원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치려 했으니 일본의 행동은 정당한 것 아닌가?" 라며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나발 댓다. (그런 논리가 지금도 유효하다면 이제 한반도가 왜놈을 칠 차례네?....)
아) 송상헌 동래부사로 임명 (4월), 그리고 내분 이후 5월~10월까지 왜적의 침입에 대한 대비와 준비는 없이 그저 명나라에 알려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하면서 의견 대립만 무성하고 , 정철을 중심으로 정여립 사건을 너무 과중하게 다뤘다며 그에 대한 논란과 탄핵 등에만 열중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 지금도 일본의 파렴치한 작태 행각을 놓고도 정치인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국방은 자주국방, 스스로 힘을 기르고 쌓지 않으면 주변 어느 나라도 자국 이익에 반해서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 대한민국이여 두 번 다시 외세의 침탈을 막기 위해서 자주력을 기르자... 임진왜란 이후 320여 년 후 또다시 왜놈으로부터 당하지 않았는가? 이제 다시는 왜놈에게 당할 수는 없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그저 자력의 힘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이제 우리 국민은 우리 선조들과는 달리 스스로 대안을 세우고 실천한다. No Japan
자) 대 명 외교의 망신과 불신 자초 5월) 조정에서는 최종적으로 김응남을 통해 명나라에 일본에 통신사가 왔다 갔단 말은 하지 않고 일본에 표류했던 이들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논조로 명나라에 알리기로 결정한 다. 그리고 만약 요동 즈음 도착해서 "명나라가 모르고 있으면 알리지 말고 아는 것 같으면 알려라"라고 명한다. 요동에 온 김응남이 보니 조선 사신을 대하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고 이미 '조선을 앞세워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다'라는 정보가 파다하자 일본 침략 가능성을 알리려 왔다 말하니 그때서 김응남에 대한 대우가 다시 좋아졌다. 이미 명은 일본에 있던 중국인에게 침략 가능성 정보를 받았고,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에서도 명에 사신을 먼저 보내 일본이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미리 전달받은 상태라서 사실 명나라는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는 조선이 혹시 일본과 함께 짜고 공격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다만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었던 허국만 조선을 믿어 줬고 얼마 되지 않아 김응남이 도착하고 나서 의심을 풀었다. 외교력의 중요성 (타이밍, 적절한 대응 안, 정보력 등등) 이 시점에 중국 명나라는 일본에 사로잡혀가 일본에서 살고 있던 허의 후라는 중국인이 일본 내 움직임과 관백의 동태를 모두 정리하여 사람을 통해 명나라에 모든 정보를 보냈고 명은 그의 편지를 통해 모든 일본의 전쟁 계획과 절차 준비사 항등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오히려 조선에서 우방이라 일컬을 수 있었던 명에 진작에 사신을 보내지 않은 실수와 정보력에서 무뇌 안인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 꼴이다. 왜놈 사신 현소가 여러 번 경고를 해도 모르고 , 명에서도 미리 알면서 조선에 사전 정보를 조선에 주지 않았으니 참....... (내치 0점, 외교 0점)
① 대마도주 평의지가 부산에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명을 치려니 조선이 길을 내달라는 본국의 요청이 있으니 조선의 답을 주시오'라고 했지만 조정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이후 부산의 왜가 묵는 왜관의 일본 인들이 점차 줄어들어 임란 직전에는 통통 비어 버렸다.
차) 당시 일본의 평 신수길은 100만 군사를 다섯 단계로 나눠 조선을 침략하려 하는데 이유는 전국 통일 후 넘쳐나는 군사력과 각 지방 다이묘들의 내란이 걱정돼 해소 차원에서 전쟁 계획을 함. (지금 일본이 우익을 끌어들여 반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무장하려는 의도와 동일 수법) 하지만 이때 조선은 당파로 갈라 싸움질하느라 대안을 세우지 못했다.
카) 그나마 조선의 대비 사항 비변사에서 '왜군은 바다에서는 강하지만 육지에서는 허접하니 성을 축조하고 육지 방어에 집중하라' 건의한다. 막상 전쟁이 나고 나니 그 반대..... 참 놔~~~ 그나마 성도 험준하고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닌 사람이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평지에 성을 축조했고 높이나 견고함도 좋지 않으니 쩝~~~ 왜군은 그저 바닷길로 넘어오고 정작 싸움은 육지에서.... 평지에 축조한 성은 무용지물 신립은 수군을 아예 철폐하자고 까지 주장하고 이에 이순신은 해적은 수군으로 막아야 한다며 반대 (1591년 7월 선묘중흥지 기록(1587~1607 임진왜란사 기록 역사서)) 10월 비변사에서 진관 제도(지방 군사조직제도, 지역 단위 군대 명령과 조직체계) 복구를 청하였으나 묵살하고 => 그냥 군대 제편을 이리저리 나눠 놓는 (혹시 역모할까 싶어서) 제승방략 체계를 고수. 결국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군대 공중분해, 도망가는 장교 및 병사 속출 유성룡은 이일을 경상병사로 발령 내려했지만 홍여순이 이름 값하는 명장을 지방에 보낼 수 없다며 반대했다. 전쟁은 경상에서 시작되었건만~~~~ 이름 있는 장수는 한양 서울에 있고.... 그런 장수가 왜란이 터지자 상주까지 왔다 군사가 모아지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신립이 있는 충주까지 도망이나 가고. 영의정 이산해가 경연에서 임금 선조에게 '지방 공물이나 진상 문서를 올릴 때 뇌물을 동봉하지 않으면 통하지가 않는다 하니 감사를 시켜 일절 금지토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선조가 조치하라 명한다. 임진왜란 전 관 행정의 부조리 부패 만연 상태임을 유추할 수 있다.
여러분 여기까지 듣고 있자니 마음에 열불이 나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순신 명장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음 편 기대해 보세요. 차기 예고 : 1592년 D-0년 임진왜란 발발 대비 이순신의 준비 사항~ 임진왜란 발발 후 옥포 해전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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