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년 D-1년
가) 2월) 이순신 진도군수 임명, 가리포진 수군 첨절제사 임명, 두 곳에 부임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됨.
① 왜군 침략 예견 이후 : 전쟁무기 정비, 방어 진지 정비, 병력 군량 확보, 전함 건조, 군사 훈련 실시.
나) 허준에 직위 대한 거부 움직임. (1월) : 선조가 정 3품의 품계를 내리자 벌어진 일 사헌부(지금의 행정기관)에서 허준이 왕자를 낮게 한 것은 인정하나 품계를 올리는 것은 가당치 않다며 반대. 사간원(왕에 대한 간쟁, 논박 등 제의)에서도 허준이 한 일은 당연한 직분이라며 분수에 맞지 않는 벼슬은 줄 수 없다며 불가 결정. (기술직 전문직을 무시하는 조선의 문관 제일주의 습성) 그래도 선조는 끝내 대간의 의견을 거부하고 조선 역사상 의원 신분으로 당상과 정 3품의 품계를 받는다.
다) 통신사 소식, 대마도 표류된 백성들
① 대마도에서 표류된 조선 백성 9명을 돌려보내 왔다. 그 대마도 사람들을 한양에 불러 접대했다. (1월)
② 통신사의 귀환 도중 편지 내용 : 통신사가 지난해 7월 수도에 들어가 11/7일 에서야 임금의 지시서 전달. 사포에서 기다리다 11/20일 답문의 문서를 받음. 문서 내용이 부당하여 고쳐 달라 요청하자 일본 사신부관 평신조가 받아서 고쳐 받아 오겠다며 떠났고, 수정 답장을 기다렸다 일본 사신 상관 현소와 함께 귀국 예정입니다. 편지는 대마도주 평의지에게 먼저 전합니다.
라) 원래 1월 말 윤두수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원균을 발령하였으나 사간원에서 전직 수령 일 때 업무평가에서 하등급을 맞은 원균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며 거부의사를 표시하고 지략가이며 젊은 사람을 발탁하기를 청원하자 선조가 받아들여, 2월에 결국 유극량으로 결정했지만 사헌부에서 유극량은 사람이 너무 유해서 부장들이 맘먹으려 하니 위급 시 통제가 어려 울 것 같다며 재 검토를 요청한다. 결국 동월 2월에 비변사에서 이순신을 건의하자 선조는 유성룡의 뜯을 받아 초특급으로 진급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2/15) 이때 선조는 이순신에게 비밀 병부도(임금과 병부 받은 장군만 통하는 비밀 전달 사항 증표) 함께 내린다. 이순신을 신뢰하는 선조. 그리고 왕의 명령 없이 군대 이동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근간. (임진란 초기 원균의 지원 요청에도 바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① 사간원에서 이순신의 초특급 승진은 벼슬 남발이라며 반대. 선조는 문제는 있어도 이순신의 자질과 능력으로 봐서 내가 그리 선택했으니 더 이상 벼슬이 높고 낮음에 대한 일을 따지지 말라 일축.
② 사간원에서 재차 이순신이 경력도 적고 그를 기대하기도 그렇고 아무리 인재가 없다 선 치고 일개 현의 관리를 수사까지 한방에 올려주십니까. 이건 요행수를 바라는 것 밖에 안됩니다. 라며 반박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교체할 수 있다면 진작 그리 했을 터 하지만 고칠 수 없으니 그리 알라!" 단호히 거절. 이때 선조가 이런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상상해 보시라.....
마) 통신사의 여정과 귀국
① 통신사 여정 : 1590년 3월 출발 대마도 4월 도착 (일본에서 격에 맞는 관리를 보내지 않음, 김성일이 이에 항의하여 한 달간 지체하고 출발 ) 대마도주 평의지가 산 위의 절에서 연회 하자며 지는 말을 타고 가고 조선 통신사는 걸어서 갔다. 열 받은 김성일이 연회에 불참 선언하고 황윤길은 참석. 이를 알게 된 평의지가 다음날 김성일에게 사죄. 이때 이후 왜인은 김성일을 깍듯이 대우함. 일본 측 안내자가 일부로 먼길을 돌아서 일본 수도 오사카성에 도착(쪽발이의 전형적 수작 지금도 변하지 않음) (중간에 왜장들이 악공 연주를 보여 달라며 요청해도 김성일은 임금님 편지도 전달하지 않았는데 이런 요구는 모욕을 당하는 꼴이니 그리 할 수는 없다며 강행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때 산동에 군사 출동 중이라 통신사는 그를 기다리게 되고 궁을 수리한다는 핑계를 대며 5달을 만나주지 않음. (쪽발이 근성) 당시 천왕은 있으나 실권은 관백이라 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독식중. 동행한 허성이 "관백을 만나 뜰에서 절해야 하나?"라고 김성일에게 묻자 "천왕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하고 현소와 상의하여 기둥 밖에 올라가서 하는 것으로 합의한다. 평의지가 김성일에게 '관백이 오기 전에 구경이나 하시지요' 권하니 김성일은 '지금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거절하였다. 황윤길과 허성은 선물 챙기느라 여러 번 행장을 바꾸고 있고 이를 본 김성일이 불손한 행동이나 한다며 일침을 가한다. 이렇듯 수행한 우리 통신사 사이에서 앙금이 있었다. 오죽하면 대마도주 평의지가 '김성일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겠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여러 차례 찾아갔다가 드디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처음 만나게 된 통신사는 그의 모습에 대해 귀국해서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생김새가 작고 볼품없으며 낯빛은 원숭이처럼 주름이 쪼글쪼글하고 눈은 풀 꺼진 것이 눈빛은 반짝 빛나며 쏘아보는 듯하였다"라고 전한다. 통신사를 맞은 수길은 연회도 없이 안주로 떡 한 접시에 탁주 한잔 놓고 대하며 예절도 엉망이었다. 얼마 후 우리 악공의 연주를 듣다가 어린아이(양자) 하나 앉고 있다 오줌을 싸니 웃으며 시중드는 여자에게 넘기고.... 수길이가 하는 짓을 보니 예의도 없고 격식도 없는 제멋대로 인간으로 평한다. 그 뒤로 두 번 다시 수길을 만나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 부 두 조선 사신에게 400냥을 주고는 조선 임금에게 전할 수길이의 회답 편지를 주지 않고 먼저 가라고 하니 김성일은 죽치고 기다리겠다 하고 황윤길은 억류될까 두려워 먼저 나가 숙소에서 기다렸다. 얼마 후 답 편지를 받고 보니 내용이 오만 방자하여 여러 차례 고치게 한 다음에야 받았다. 돌아오면서 왜장들이 주는 선물을 김성일은 모두 거절하고 왔다. 부산에 3월에 당도하고 조정에 올라가 보고 하기를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터질 것 같다"라고 보고하고 김성일은 "전란이 터질 기미는 없다 괜히 황윤길이 오버하여 불안만 가중시키려고 그렇게 보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선조가 수길의 모습에 대해 물 은니 황윤길은 "눈이 번쩍번쩍한 것이 담력과 지혜가 있어 보이더라"라고 하지만 김성일은 "눈은 쥐새끼 같아 무서워할 나위도 못돼 보입니다"라고 보고한다. 사실 김성일은 황윤길이 너무 겁먹고 체면 깎기는 짓을 해서 열 받아 어깃장 노은 것이다. 서인들이 황윤길의 생각을 지지하자 사람들은 힘이 약해진 서인이 동요가 일만 한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얼마 후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황 씨와 어긋나게 말한 이유가 뭔가? 그러다 전쟁이 나면 어찌하려고?"라며 묻자 김성일은 "나도 왜 놈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 장담 못한다. 하지만 온 나라가 놀라 동요하고 의혹이 일까 봐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할 따름입니다"라고 답한다. (훗날 김성일은 경상우도 관찰사로 진주성 김시민을 지원하고 의병을 지원하며 왜놈과 싸운다. 1593년 그는 진주에서 전염병에 감염되어 병사한다)
바) 핵심 정보를 보고하고도 파면당한 오억령 (썩은 조정 신하들의 모함) 통신사와 함께 돌아온 일본 사신 현소가 연회에서 홍문관 관리 오억령에게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치려하니 조선이 길을 좀 내주쇼"라는 말을 듣고 긴박함을 감지하고 조정에 보고 했으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안전 불감 등 만성병 들린 썩어 빠진 조정 신하들은 오억령이 괜한 소리를 한다며 그를 심희수로 교체하려 하였다. 그러자 오억령은 아예 조서로 써서 문서로 상소했다. 이후 그는 썩어빠진 조정의 신하들에 의해 파면당했다.
사) 시건방지고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 왜놈 사신 현소의 주둥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려니 길을 내어 달라는 왜놈 사신 현소와 평조신 김성일에게 현소가 "명나라와 외교가 오랫동안 끊겨 이번에 관백이 명나라에 조공을 하려 한다. 그런데 만약 명이 이를 거절하면 우리 일본은 수치스러워 명나라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이런 일본의 입장을 조선이 명나라에 먼저 전달해 달라. 일이 잘 이뤄지면 전쟁을 피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 백성도 싸움을 하게 되는 고통을 면하게 될 것이다?라는 싹퉁바가지 없는 개 같은 소리를 한다. ( 영원한 주적 1호는 일본일 수밖에 ) 김성일이 명나라와의 의리상 그리 할 수 없다 말하자 현소란 놈이 이번에는 "옛날 고려는 중국 원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치려 했으니 일본의 행동은 정당한 것 아닌가?" 라며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나발 댓다. (그런 논리가 지금도 유효하다면 이제 한반도가 왜놈을 칠 차례네?....)
아) 송상헌 동래부사로 임명 (4월), 그리고 내분 이후 5월~10월까지 왜적의 침입에 대한 대비와 준비는 없이 그저 명나라에 알려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하면서 의견 대립만 무성하고 , 정철을 중심으로 정여립 사건을 너무 과중하게 다뤘다며 그에 대한 논란과 탄핵 등에만 열중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 지금도 일본의 파렴치한 작태 행각을 놓고도 정치인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국방은 자주국방, 스스로 힘을 기르고 쌓지 않으면 주변 어느 나라도 자국 이익에 반해서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 대한민국이여 두 번 다시 외세의 침탈을 막기 위해서 자주력을 기르자... 임진왜란 이후 320여 년 후 또다시 왜놈으로부터 당하지 않았는가? 이제 다시는 왜놈에게 당할 수는 없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그저 자력의 힘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이제 우리 국민은 우리 선조들과는 달리 스스로 대안을 세우고 실천한다. No Japan
자) 대 명 외교의 망신과 불신 자초 5월) 조정에서는 최종적으로 김응남을 통해 명나라에 일본에 통신사가 왔다 갔단 말은 하지 않고 일본에 표류했던 이들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논조로 명나라에 알리기로 결정한 다. 그리고 만약 요동 즈음 도착해서 "명나라가 모르고 있으면 알리지 말고 아는 것 같으면 알려라"라고 명한다. 요동에 온 김응남이 보니 조선 사신을 대하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고 이미 '조선을 앞세워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다'라는 정보가 파다하자 일본 침략 가능성을 알리려 왔다 말하니 그때서 김응남에 대한 대우가 다시 좋아졌다. 이미 명은 일본에 있던 중국인에게 침략 가능성 정보를 받았고,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에서도 명에 사신을 먼저 보내 일본이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미리 전달받은 상태라서 사실 명나라는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는 조선이 혹시 일본과 함께 짜고 공격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다만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었던 허국만 조선을 믿어 줬고 얼마 되지 않아 김응남이 도착하고 나서 의심을 풀었다. 외교력의 중요성 (타이밍, 적절한 대응 안, 정보력 등등) 이 시점에 중국 명나라는 일본에 사로잡혀가 일본에서 살고 있던 허의 후라는 중국인이 일본 내 움직임과 관백의 동태를 모두 정리하여 사람을 통해 명나라에 모든 정보를 보냈고 명은 그의 편지를 통해 모든 일본의 전쟁 계획과 절차 준비사 항등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오히려 조선에서 우방이라 일컬을 수 있었던 명에 진작에 사신을 보내지 않은 실수와 정보력에서 무뇌 안인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 꼴이다. 왜놈 사신 현소가 여러 번 경고를 해도 모르고 , 명에서도 미리 알면서 조선에 사전 정보를 조선에 주지 않았으니 참....... (내치 0점, 외교 0점)
① 대마도주 평의지가 부산에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명을 치려니 조선이 길을 내달라는 본국의 요청이 있으니 조선의 답을 주시오'라고 했지만 조정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이후 부산의 왜가 묵는 왜관의 일본 인들이 점차 줄어들어 임란 직전에는 통통 비어 버렸다.
차) 당시 일본의 평 신수길은 100만 군사를 다섯 단계로 나눠 조선을 침략하려 하는데 이유는 전국 통일 후 넘쳐나는 군사력과 각 지방 다이묘들의 내란이 걱정돼 해소 차원에서 전쟁 계획을 함. (지금 일본이 우익을 끌어들여 반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무장하려는 의도와 동일 수법) 하지만 이때 조선은 당파로 갈라 싸움질하느라 대안을 세우지 못했다.
카) 그나마 조선의 대비 사항 비변사에서 '왜군은 바다에서는 강하지만 육지에서는 허접하니 성을 축조하고 육지 방어에 집중하라' 건의한다. 막상 전쟁이 나고 나니 그 반대..... 참 놔~~~ 그나마 성도 험준하고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닌 사람이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평지에 성을 축조했고 높이나 견고함도 좋지 않으니 쩝~~~ 왜군은 그저 바닷길로 넘어오고 정작 싸움은 육지에서.... 평지에 축조한 성은 무용지물 신립은 수군을 아예 철폐하자고 까지 주장하고 이에 이순신은 해적은 수군으로 막아야 한다며 반대 (1591년 7월 선묘중흥지 기록(1587~1607 임진왜란사 기록 역사서)) 10월 비변사에서 진관 제도(지방 군사조직제도, 지역 단위 군대 명령과 조직체계) 복구를 청하였으나 묵살하고 => 그냥 군대 제편을 이리저리 나눠 놓는 (혹시 역모할까 싶어서) 제승방략 체계를 고수. 결국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군대 공중분해, 도망가는 장교 및 병사 속출 유성룡은 이일을 경상병사로 발령 내려했지만 홍여순이 이름 값하는 명장을 지방에 보낼 수 없다며 반대했다. 전쟁은 경상에서 시작되었건만~~~~ 이름 있는 장수는 한양 서울에 있고.... 그런 장수가 왜란이 터지자 상주까지 왔다 군사가 모아지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신립이 있는 충주까지 도망이나 가고. 영의정 이산해가 경연에서 임금 선조에게 '지방 공물이나 진상 문서를 올릴 때 뇌물을 동봉하지 않으면 통하지가 않는다 하니 감사를 시켜 일절 금지토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선조가 조치하라 명한다. 임진왜란 전 관 행정의 부조리 부패 만연 상태임을 유추할 수 있다.
여러분 여기까지 듣고 있자니 마음에 열불이 나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순신 명장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음 편 기대해 보세요. 차기 예고 : 1592년 D-0년 임진왜란 발발 대비 이순신의 준비 사항~ 임진왜란 발발 후 옥포 해전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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