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임란직후 조정과 육상 전투 |
서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 입니다.
지난 회 올려드린 영상에서는 / 임진왜란 개전 초 / 부산 및 경상 남부지역의 전투 상황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요 / 이번 시간에는 / 일본 침략을 알게 된 / 조선 조정에서 취한 초기 대응과 / 조선과 일본군이 육상에서 맞붙은 / 상주 및 충주 전투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일 장군의 상주 전투와 / 신립 장군의 충주 탄금대 전투는 /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전한 전투입니다. /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는 / 조선군이 패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 세세한 전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유성룡의 징비록과 / 일본에 선교사로 있었던 포르투갈 신부 / 루이스프로이스의 기록 일본사 /그리고 선조실록 등/ 여러 자료를 비교하며/ 시간대 별로 구성하여/ 더 구체적인 사건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왜란 발발 직후
1. 조선 조정에서 초기 대응을 어떻게 계획 했는지
2. 상주 전투에서 이일 장군이 어떻게 하다가 패전하였는지
3. 조정에서 강화를 위해 일어 통역사 경응순을 파견 했지만 실패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4. 임진왜란 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던 김성일의 징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 번 영상에서는 / 신립 장군의 충주 탄금대 패전 원인과 / 이때 경상 우수사 원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조선 조정의 왜란 발발 후 초기 대응
4월13일 / 부산 앞바다에 왜선이 나타났고 / 4일 뒤인 4월17일 / 경상 좌수사 박홍이 보낸 장계가 / 처음 서울에 도착 합니다. 이때 조정의 대신들은 / 선조 임금에게 대면하면서 / 구두 보고를 하려고 했지만 / 임금 뵙기를 거부당합니다. / 그래서 신하들은 / 우선 급한 대로 글로써 보고를 올립니다. (선조 임금도 그랬고 / 지난 대통령도 그랬고 / 나라에 큰일이 발생했을 때 / 나라의 최고 자리에 있는 분들이 / 대면 보고를 거부한 체 /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증을 더하게 됩니다. ㅎㅎㅎ 아무튼 / 신하들은 위급한 상황에 닥쳐서 / 임금님을 만나 볼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조정 대신들은 / 사변에 대한 대응 책을 / 글로 써서 / 선조에게 올리게 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양에서 경상도로 내려가는 길은 / 좌도, 중로, 우로 세가지 길이 있는데 / 성응길을 좌도 방어사로 삼아 좌도로, 이일은 순변사로 삼아 중로로, 그리고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아 우로로 보내자고 합니다.” 라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 경상도로 내려가다 나오는 / 세 개의 고갯길 / 죽령, 조령, 추풍령에 대한 대책도 이렇게 보고합니다.
“좌도로 가다 나오는 (단양을 넘어 영주 가는 곳인) 죽령은 / 유 극량(조방장)이, 중로로 가다 나오는 (충주에서 문경 넘어 상주로 가는 곳인) 조령은 / 변기(조방장)가, 우로로 가다 나오는 (영동을 넘어 김천 가는 곳인) 추풍령은 / 조경(우방어사)이 각각 떠맡고 / 경주 부윤 유신인(무장 아닌 선비임) / 윤인함을 (나중 의병을 모아 항전) 대신해서 / 강계부사이며 현재 상중인 / 변응성을 배치하겠다”라는 글을 올리고 / 그렇게 곧바로 실행합니다. 또 바로 이어서 / 경상 좌수사 박홍의 두번째 장계인 /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 또 서울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지도를 보면 / 조선의 장수들은 / 세갈래 길로 경상도로 내려가고 / 부산을 점령한 일본 왜군은 / 세갈래 길로 나눠 올라오는 경로를 / 표시해 두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시면 /
먼저 / 좌도를 따라 죽령 길은 / 성응길 그리고 유극량(유극량은 죽령에서 패하고 얼마 후 임진강에서 전사합니다.) 죽령에서는 / 일본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와 붙고 /
중로를 따라 조령 길은 / 이일과 변기가 / 일본 장수인 / 고니시 유키나가와 붙게 됩니다.
그리고 우로를 따라 추풍령은 / 우방어사 조경이 / 일본 장수인 구로다 나카마사와 싸우게 됩니다. (조경은 추풍령에서 패하지만 나중에 행주산성에서는 권율 장군을 도와 승리한 사람입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 조선 장군 / 인물 중심으로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이일 장군입니다.
순변사 이일의 행적
순변사 이일이 / 한양에서 용병 300명을 이끌고 가겠다고 / 먼저 제안을 합니다. / (….여기서 그리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을 다룬 영화 300이 생각납니다. ㅎㅎㅎ) / 그러니까 / 병조에서 출병 인원을 선발했는데 / 이때 선발된 군사들을 / 유승룡 가만히 보니까 / 무사는 커녕 / 군대의 군자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고 / 그나마 절반 정도는 / 유생이나 / 서리들이었는데 / 이들은 하나같이 용병으로 착출이 안됐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 유생은 무기 대신 글쓰는 종이를 말아 들고있고 / 서리는 머리에 평정건(머리에 쓰는 두건)을 두르고 있는 겁니다. 결국 용병으로 삼을 사람이 없어서 / 이일은 출전 명령을 받고도 / 3일이나 지체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일은 할 수 없이 4/20일 / 일단 먼저 상주로 출발하고 / 병조에서는 후발해서 병력을 추가로 보내기로 합니다. (선조수정실록 기록에는 / 이일이 기마병 군관 60명과 / 군사 4천명을 모아 내려갔다고 되어 있고, 상주에 도착해서는 / 총6천명으로 늘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카톨릭 선교사 프로이스의 일본사 기록에는 / ‘상주에 모인 2만명의 조선군’ 이라고 기록 되어있는데 / 조선 군사 규모에 / 차이가 나는 이유는 / 아마 일본 기록에 과장이 / 즉 뻥카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냐면 / 일본 역사서 기록들은 / 같은 사건을 두고도 / 사료 마다 서로 달리 기록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봐도 / 일본 역사 기록은 허구가 많고 / 신뢰성을 의심 할 수 밖에 없다고 보겠습니다. / 그나마 임진란사에 대한 정확한 내용도 / 조선의 유성룡이 쓴 징비록이 / 훗날 17세기에 / 쓰시마를 통해 / 일본에 유입되면서부터 / 임진왜란 사에 대한 기록이 / 사실적으로 서술되는 문헌이 나타나고 있으니 / 일본의 역사 기록 수준은 / 오류 또는 오기록이 아니라 / 그냥 의도된 외곡 또는 /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기록이라고 /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습성은 /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 되어 / 일본은 역사를 애써 감추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 사실 징비록에 기록된 것으로 말하면 / 상주 전투에서 / 실제 조선 병사는 / 약 9백명이 못되는 숫자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 조선의 군사 분권 체계인 / 제승방략 (制勝方略)에 대해서 / 설명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승방략이란 / 적의 침입에 맞서 / 각 지역의 군사를 / 요충지에 집결시킨 다음 / 중앙에서 파견한 장수가 / 이를 통솔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 대규모 전에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으나 / 만약 본진이 무너지면 / 그 후방은 / 모두 적에게 노출되는 단점을 / 가지고 있는 체계였습니다. 그래서 제승방략체제는 임진왜란 초기 패전의 원인이 되었고 / 이후에는 폐지되어 버렸습니다.
이 제승방략에 따라 / 당시 문경 이남의 고을 수령들은 / 각자 자기 군사를 이끌고 대구에 집결하고 / 서울 한양에서 / 순변사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 몇일을 기다려도 소식은 없고 / 왜군은 코앞에 다가오고 / 하필 그때 비가 억수로 오고 / 거기다가 식량도 떨어지자 / 집결해 있던 조선군은 / 두려워져서 동요가 일더니 / 모두 밤을 틈타 도망가버리고 / 수령마저 해산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이 시점에 이일은 / 문경에 도착 했고 / 고을이 텅비어 있자 / 스스로 식량을 찾아 / 병사들 끼니를 해결하고 나서 / 다시 상주까지 왔는데 / 마중 나와야 할 상주 목사 김해는 / 이일을 마중 나가는 척하다가 / 그 길로 도망을 쳐버립니다. 참나… (이때 도망 갔던 상주 목사 김해는 / 그 뒤 1년 지난 1593년 / 상주에서 다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는 합니다. 다시 정신을 차린거죠…)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한 이일은 / 상주 목사가 없자 / 대신에 판관 권길을 끌어내서 / 군사를 모아 놓지 않았다며 / 목을 베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자 / 권길은 그 길로 당장 군사를 모아 오겠다고 말한 뒤 / 다음날 아침 / 농부들 수백명을 대동하여 돌아옵니다. 또 이일 스스로도 / 상주 백성들을 달래고 모아서 / 수백명을 더 모읍니다. 하지만 모여진 병력이 / 모두 일반백성인지라 훈련을 하기로 합니다. 이때 일본 왜군은 / 구미와 상주 중간 지점인 / 선산이라는 곳까지 와 있는데 / 이를 알게 된 한 사람이 / 상주로 와서 이일에게 보고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가까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일은 / 사기 떨어지는 소리 하고 있다면서 / 그 사람의 목을 베려고 합니다. / 그러자 그 사람은 이일에게 / “나를 죽이려 거든 내일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나오니까 / 일단 살려 둡니다. 다음 날 24일 아침 /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자 / 결국 이일은 그 사람을 목베고 효시합니다. (여기까지 봐서는 / 이일이 군기 잡는데는 대단해 보이죠?) / 이때 왜군은 상주에서 / 약 8Km 떨어진 / 장천이라는 곳까지 와 있었는데도 / 이일은 척후병 (정찰병) 하나 내 보내지도 않았고 / 그나마 급보를 전한 사람마저 / 군기 저하시킨다며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4월 25일 / 상주에 집결된 군사가 / 총 9백명도 못되고 모두 초자니까 / 상주성을 나와 / 북천이라는 넓은 곳에 나가서 / 진 치는 훈련을 시킵니다. 이일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체 지켜보고 / 휘하 상주 지역 권관들은 / 그 뒤에 쪼로록 서서 참관 합니다. (네명 인데요… 윤섬, 박지, 권길, 김종무 / 이들은 모두 상주 전투서 전사합게 됩니다.) 훈련중에 / 주변에 수상한 자들 / 그러니까 일본 정찰병들이 움직이는 것을 / 여러 사람이 목격했는데 / 이일이 / 전날 왜군이 근처에 왔다고 알렸던 사람을 / 목베는 광경을 봐서 그런지 / 사람들은 감히 말을 못 꺼내게 됩니다. 자기도 목 베일 까봐서 였겠죠.
그런데 / 이때 상주성 안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이자 / 그 때서 말 탄 군관 한 명을 / 확인 차 보냈는데 가다가 갑자기 조총을 맞고 죽습니다. 그리고 / 바로 왜군이 나타나 그의 목을 베고 달아나자 / 조선군들은 그것을 목격하고 / 사기가 뚝 떨어져버립니다. 잠시후 / 조총든 왜군 여러명이 총을 쏘며 나타나자 / 조선군도 화살을 쏘아 대는데 / 평소 무기 정비가 되지 않았는지 / 쏘는 화살 마다 코 앞에 떨어지니 / 상대가 되지 않았고 / 왜군은 이때부터 좌우로 둘러싸서 / 포위 형태로 몰려오니까 / 이때 맨 먼저 이일 장군이란 자가 / 겁에 질려서 줄행랑을 놓고 / 그 밖의 조선 군사는 당연히 도망가느라 정신 없고 / 왜군이 / 이일이 수장이라는 것을 알고 뒤를 바짝 쫓아 가니까 / 이일은 아예 / 말도 버리고 / 갑옷도 벗어 던지고 / 머리도 헤쳐 풀고 / 걸음아 나 살려라 / 하면서 알몸뚱이로 쏜살같이 도망치다가 / 문경까지 당도하고 나서야 / 일단 패전 소식을 / 조정에 글로 날리고서 / 충주 에 있는 신립 장군이 있는 곳으로 냅다 달려갑니다. 어후~~~ 쫄 장부 ….
여러분 / 이일 장군이 지난 임진왜란 이전 /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에서 / 여진족 상대로 목숨 걸고 싸울 때 / 싸움에서 패전 했다며 / 이순신 장군을 목 베려고 했었죠. / 이일은 참/ 비겁하고 나쁜 장수 입니다. 이자는 / 임진왜란 이후까지도 살아남았다가 / 함경남도병사까지 해먹고 / 거기다 자기 부하를 죽인 죄를 짖고 조정으로 불려오다가 / 병들어 죽습니다. 이렇듯 비겁한 놈이 / 전쟁에서 살아 남는 것을 보면 / 중국 역사서를 쓴 사마천이 / 관안열전에서 말한 대로 / 천도시비 (天道是非) / ‘하늘의 뜻은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라는 그 물음…./ 다시 말해서 / 가장 / 공명정대하다고 여겨지는 하늘마저 / 과연 바른 자의 편인가 아니면 그렇치 않은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선한자 충성된자는 죽고 / 비겁하고 무능하고 악한 자는 살아 남는 세상/ 이러한 불합리를 한탄하게 되고 하늘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 여러분은 이일 장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이런 사람 / 꼭 있죠?
다음은 전쟁 중 / 강화 또는 휴전을 협상하려 했던 /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당시 일본어 통역이 가능했던 / 경응순 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통역사 경응순 이야기
[충무공 167쪽 선조실록은 애매함. 충무공 169 선조수정실록. 징비록 77~78, 루이스 59~61]
일본 역사 기록에 의하면 / 왜군은 / 조선인을 잡아 심문하고 지배하기 위해 / 음덕기라는 한국어 회화집까지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번 상주 전투에서는 / 이일과 함께 일본어를 할 줄 아는 / 경응순이 참전 했다가 /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생포 됩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통역관인 경응순이 / 왜 한양에서 상주까지 / 이일 장군과 함께 와 있었냐는 것 입니다. 통역하기위해서? / 그렇다면 / 무엇을 통역하려 했을까요?
이 부분에서 / 유성룡이 쓴 징비록과 / 카톨릭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가 일본에서 기록한 부분에 / 차이가 납니다. 징비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일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 울산 군수이었던 이언함을 잡아서 /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서신을 / 서울 선조 임금에게 / 직접 전달하라면서 풀어 줬는데 / 이 울산 군수가 / 서울에 와서는 / 왜군에게서 풀려났다는 말을 하면 /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서 / 스스로 도망쳐 나왔다며 / 그 풍신수길의 서신을 /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 조선에서 아무 회답이 없자 /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번에는 / 상주에서 포로로 잡은 경응순을 살려 보내면서 / 경응순에게 다시 풍신수길의 서신을 주고 / 거기다가 공문으로 / 조선이 강화 의사가 있다면 / 예전 일본 사신을 응대 했었던 / 이덕형을 보내고 / 장소와 시간은 / 충주에서 28일날 보자 이렇게 써서 보냈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 강화를 먼저 요청 한 것은 / 징비록에서는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것이죠. 그래서 조정에서 답서를 만들어서 / 경응순과 이덕형을 충주로 보내고 이를 계기로 / 왜군의 진격을 좀 늦출 수 있지 않을까 / 기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 이덕형이 충주에 도착 하기도 전에 / 이미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 이덕형은 확인 차 경응순을 앞서 보냈는데 / 결국 먼저 간 경응순은 소서행장의 정적인 / 가등청정에게 붙잡혀 / 살해되고 맙니다. 이덕형은 그 길로 다시 선조를 찾아 되돌아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기록에는 / 그 반대로 / 조선에서 먼저 / 강화를 위한 서신을 / 일본어가 가능한 통역사 / 경응순을 통해서 보내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 일본의 기록은 / 소서행장이 상주 전투를 승리하고 / 바로 풍신수길에게 전황을 보고하기 위한 / 편지 안에 적힌 내용입니다. 이 기록은 / 비록 서양 신부가 적은 것이지만 / 일본 왜장의 편지니까 / 있는 그대로 옮겨 기록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몇가지 / 거짓이 드러나는 편지 입니다. 첫째 / 소서행장은 / 상주 전투에서 조선 총대장을 죽였고 / 조선군이 2만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일은 달아났고 / 조선군은 900여명이었죠? / 또 편지에 / ‘조선인 통역관 경응순을 생포 했는데 / 그 자가 전쟁에서 불리해진 / 조선 왕의 명을 받고 / 일본 관백에게 / 인질을 보낼 것이며 / 일본이 중국 원정을 하게 되면 / 길을 안내하며 돕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 소서행장이 / 관백의 서신과 / 자기가 몇가지 조건을 달아 / 다시 경응순을 서울로 돌려 보냈고 / 경응순은 이삼일 안에 / 두 세명의 인물과 회답을 가져 오겠다며 / 기다려 달라 하기에 / 그럼 28일 충주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 문경에 도착 했더니 ‘성이 텅 비었다’라고 기록합니다. 또 그 편지에는 서울이 코앞인데 / 자기는 서울을 구하려 하는데 혹시라도 관백이 파괴하라 한다면 파괴하겠다라고 말하고 / 일본군이 지나온 길에 관백의 증서를 나눠줘 조선인을 안심시키고 있고 / 서울 도성에 도착하면 / 그간 착취 당했던 조선 백성들이 / 자기들을 환영하게 될 것이다.라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 마지막에 “본국에 있는 일본인들을 / 조선으로 이주 시킬 준비를 하세요”라고 까지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 역사의 교훈은 / 이런 구절을 새겨 두어야 하는 것 입니다. 지금도 친일을 옹호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 아시죠. 얼마전에 일본을 옹호하는 사람이 저의 영상에 더러운 댓글을 달고 갔어요 / 아마 한국어를 아는 우익 일본인 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설마 내국인은 아니겠죠.
이 내용에서 누가 먼저 강화를 제안했는가… 조선? 아니면 일본?
불리해 지면 거짓 역사를 쓰는 일본이지만 이번 만큼은 전쟁에서 유리한 입장에 있는 그들이 강화를 하자는 요청을 먼저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연패를 하며 다급해진 조선이 먼저 강화를 요청하면서 시간을 끌어 보려고 통역 가능한 경응순을 상주까지 가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 이번에는 / 임진왜란 1년전에 / 조선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와 / 전쟁이 일어 날리 없다고 주장한 김성일에 대해서 /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통신사로 일본 침략은 없을 거라 했던 김성일 이야기
[징비록 66~69, 핵심 남자 논개 군관 이종인, 의병 구성 ]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 조선 통신사 부사로 / 일본을 다녀온 후 /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리 만무하다고 / 선조에게 보고했던 / 김성일은 임진왜란 직전에 / 경상 우병사로 발령나서 / 임지인 마산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김성일이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듣고 / 길을 재촉해서 상주를 지나 / 본영 마산에 거의 다 와가는데 / 군사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려 하는 겁니다. 이때 김성일은 자기 군관 중 / 이종인이라는 사람을 불러 놓고 / “당신은 용감한 군인인데 당신 마저 도망가면 되겠는가?”라고 크게 외치자 / 이종인은 그제야 용기내서 / 칼을 들고 금가면을 쓰고 달라드는 왜군을 / 말을 타고 달려가 / 화살로 쏘아 죽이니까 / 왜군이 감히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 이 이종인은 그 뒤로 1년지난 / 2차 진주성 전투 때 패하게 되자 / 왜군을 양팔에 한 명씩 껴안고 / 남강에 투신했다고 합니다. 즉 / ‘남자 논개’라고 봐야겠습니다. ) 당시 선조는 / 왜란이 일어나자 의금부에 /왜란이 없을 거라던 김성일을 당장 잡아오라 명했고 / 이에 김성일을 잡아가는데 / 이를 본 경상 감사 김수가 작별하러 갔더니 / 김성일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 왜군을 물리치는데 힘을 다해주시오”라고 말하고 / 연행되서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에 / 직산 (천안 근처)까지 왔는데 / 왕이 다시 정상 참작을 해서 / 초유사로서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 경상도에서 의병 활동 지원이라도 할 수 있도록 풀어줍니다. 이후 김성일은 / 의병장들에게 / 물자와 병력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지 지방관과 의병장 간의 대립이 생겼을 때 / 의병장들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 대립을 중재하고, 의병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합니다. 특히 의병장 곽재우를 많이 지원 했지만 / 김성일은 / 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병사하고 맙니다.
김성일은 자기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서 의병을 돕는 일에 열중 했던거죠….
반성하는 자세…. 누구나 잘 못과 과오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잘 못을 저지르고도 버젓이 살아가는 파렴치들도 많이 보게 되죠….
결론
[징비록 92쪽 징비의 의미 나열]
우리 주변에 나라의 책임을 맞고 있는 사람들 중 / 혹시 이일 같은 인물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나라를 두 번 다시 외세의 힘에 굴욕을 당하고 잃을 순 없잖아요.
차기 예고
다음 회에는 신립 장군의 충주 탄금대 패전 원인과 / 이때 경상 우수사 원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인문학 TV 고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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