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후 본기
1. 서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여태후 본기 이야기를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 역사서 사기본기는 12 본기 왕조체계를 기록한 제왕에 대한 전기적 기록입니다. 구성을 세개로 나눠본다면 상고시대인 오제(황제, 전욱, 제곡,요,순), 하,은,주 본기와 근고사인 진본기, 진시황 본기, 항우 본기가 있고 금세사인 고조 본기, 여태후본기,효문본기 효경제 본기 효무제본기까지 총 12 본기인데 이중에 항우와 여태후는 제왕이 아니었지만 같은 급으로 다루었습니다.
효혜제가 어린 나이에 유약해 실제적 권력을 행사한 여태후를 현실적 인물로 평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마천은 관념적 대상 보다는 실질적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역사관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주제
많은 사학자들은 사마천이 기록한 역사서를 통해 여태후가 표독하며 유씨의 천하를 여씨의 천하로 바꾸려고 했다며 그녀의 간괴함을 말하고 있는데 과연 여태후가 악녀 이었을까? 만약 악녀였다면 그 이유는 왜 그랬을까? 여태후가 유방이 봉기할 때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악녀는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그녀를 악녀로 변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태후의 전기를 통해서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악해지고 변질되어가'라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 썩 좋은 변화는 아니지만 특히 권력욕 부문에서)
3. 유방의 부인들
조씨, 여치와 박씨, 척씨 부인은 모두 한고조 유방의 아내다.
조씨 부인은 유방이 처음 만난 여자 하지만 정식 혼인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그녀로부터 아들을 낳았는데 그는 유비(제왕)이 된다.
여치는 유방과 정식으로 혼인한 정실부인으로 초한 대전때 유방의 아버지인 유태공과 함께 팽성전투이후 항우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항우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유방이 수레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어린 아들과 딸을 수레 밖으로 집어던졌다. (번쾌 하후영 열전에 잘 소개) 이때의 아들이 유영(훗날 혜제), 딸(노원공주)다. 유태공과 여치가 인질에서 풀려난 건 초한 대전의 끝 무렵인 광무산 대전 때이니 거의 3~4년을 항우에게 붙잡혀 있었던 것 본처는 적국 초나라에 인질로 잡혀있고, 유방은 자기 적통 자식인 남매를 저 살겠다고 내던졌으니 아마 이 때부터 여치의 마음 속에는 남편 유방에 대한 마음은 반은 떠나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혹시 이 방송을 보시는 분중 자녀를 둔 기혼 여성분이 보신다면 아내된 입장에서 여치의 입장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박씨 부인은 처음에는 유표의 아내 였다가 유방에게 온 여인으로 유방 생전에는 별로 총애받지 못한 후궁이지만, 훗날 그녀의 아들 유항이 3대 황제 문제가 되면서 태후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가장 문안한 어머니 상이죠....
척씨 부인은 유방이 생전에 가장 사랑했고 아들 여의를 낳아 조왕이 되지만 기존 태자의 폐위 문제로 인해 유방 사후 태후가 된 여치로부터 끔찍한 보복을 당한 인물입니다.
4. 고사성어
5. 배경 및 소개
여태후의 이름은 여치로 진나라말 패현에서 유방이 정장이었을때 정실부인이었다. 자녀로는 노원공주와 훗날 황제가 되는 유영 혜제를 두었었다. 유방이 진나라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한왕이 된후 정도에서 척희(戚夫人)를 얻고 그녀를 통해서는 훗날 조은왕(趙隱王)이 된 여의(如意)를 낳았다. 초나라 항우를 무찌르고 전국을 새롭게 차지한 유방은 한나라 고조 황제가 되고 본처인 여치는 황후가된다. 황후가된 여치는 건국 공신들 중에서 팽월, 한신과 같이 향후 걸림돌이 될만한 공신들을 모사하여 죽음에 이르게한다. 여기까지는 한나라 초기 황제의 권력을 확실하게 하기위한 그녀의 조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예로 여후가 소하를 이용해 한신을 죽이고 유방에게 보고하자 유방은 그리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모로 귀향가던 팽월을 굳이 다시 불러들여 모함을 통해 죽음까지 이르게한다. 만약 이때 여후의 공신 제거가 없었다면 한나라는 건국초기 다시 와해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통일 한나라를 굳건히 하기위한 그녀의 역할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6. 유방 유씨와 여후 여씨의 가계도
한나라를 세우게된 유방 고조의 계보와 여태후 외척의 계보를 먼저 살펴보자 (도표로 자료 준비)
7. 책내용
여태후(呂太后)는 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취한 아내다. 그녀는 혜제(惠帝)와 딸 노원태후(魯元太后)를 낳았다. 고조가 한왕이 된 이후 다시 정도(定陶)1)에서 척부인(戚夫人)을 얻어 매우 총애했다. 척부인은 후에 조은왕(趙隱王)이 된 여의(如意)를 낳았다. 혜제는 어질지만 나약하여, 고조 유방은 태자를 폐위하고 척부인의 소생 여의 책봉하려고 했다. 태자가 유방 자신을 닮지 않고 여의야 말로 자기를 닮았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조의 총애를 받은 척부인은 항상 황제를 따라 관동까지 따라다니곤 하다가 어느 날 고조의 면전에서 밤낮으로 울며 자기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해 달라고 애원했다. 반면 여후는 나이가 들자 늘 집 안에 머물러 있게 되고, 고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게 되어 점점 소원해졌다. 당시 유방은 척부인의 아들 여의는 조왕(趙王)에 봉해진 이후 일찍이 몇 번에 걸쳐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뻔하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대신들(번쾌,주발,소하 등등)의 간언과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계책(유후세가에 상산의 사공자 초청이야기 잘 설명) 으로 태자는 가까스로 폐위되는 운명을 모면할 수 있었다. 여후는 사람됨이 의지가 굳고 강직하고,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는데 보좌했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팽월,한신)을 죽이는 데에 있어서 그녀의 임김이 작용할 때가 많았다. (여씨 형제도) 여후의 오빠들(여택과 여석지)은 모두 고조의 부장(部將)이었다. 큰오빠 주여후(周呂侯)가 적과 싸우다가 패사하자 그의 아들 여태(如臺)와 여산(呂産)은 역후(酈侯)와 교후(交侯)에 각각 봉해졌다. 또 그녀의 작은오빠 여석(呂釋)은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당시 여후의 여동생 여수는 번쾌와 혼인 했다. 고조 12년 기원전 195년 4월 고조가 장락궁(長樂宮)에서 승하하자, 태자가 제위를 계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당시 고조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다.(가계도) 맏아들 유비(劉肥)는 혜제의 배다른 형으로, 제왕에 봉해졌다. 유비를 제외한 그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혜제의 동생이다.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조왕에, 박부인(薄夫人)의 아들 유항(劉恒)은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비빈들의 소생으로, 유회(劉灰)와 유우(劉友)는 양왕(梁王)과 회양왕(淮陽王)에, 유장(劉長)과 유건(劉建)은 각각 회남왕(淮南王)과 연왕(燕王)에, 고조의 동생 유교(劉交)는 초왕(楚王)에, 고조 맏형의 아들 유비(劉鼻)는 오왕(吳王)에 각각 봉해졌다. 유일하게 유씨가 아닌 초한전 때 공신인 파군(番君)지역 오예(吳芮)의 아들 오신(吳臣)으로 그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다.
*. 여태후의 복수극 (척부인과 유여의 운명)
척부인과 조왕 여의를 가장 증오했던 여후는 척부인을 영항(永巷)(죄지은 궁녀들 유폐지)에 가두고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했다. 사자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조나라에 보냈으나 그때마다 조나라의 승상 주창(周昌)이 말했다.(장승상열전참조) 「고제께서 신을 조나라에 보낸 목적은 나이가 어린 조왕을 잘 보살피라는 뜻에서였습니다. 가만히 들으니 척부인에게 원한이 깊은 태후께서 조왕을 불러 같이 죽이려고 한다고 하니 제가 감히 왕을 보낼 수 없습니다. 또한 조왕은 지금 병이 나서 아픈 몸이니 조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여후가 듣고 대노하여 사자를 다시 보내 주창을 장안으로 소환했다. 주창이 장안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다시 사자를 보내 조왕을 소환했다. 조왕이 출발하여 미처 장안에 당도하기 전에 인자한 성격의 효혜제는 태후가 의도한 바를 미리 알고 친히 패상(霸上)으로 나아가 조왕을 맞이하여 함께 궁으로 들어가 침식을 같이 하며 옆에 끼고 보호했다. 여기서 혜제의 성품을 알 수있습니다. 때문에 조왕을 죽이려는 여태후는 한참 동안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침내 효혜제 원년 12월 기원전 194년 혜제가 사냥을 아침 일찍 나갔고. 조왕은 나이가 어렸음으로 일찍 일어나지 못해 궁에 남았다. 조왕이 혼자 남았다는 소식을 들은 태후가 사람을 시켜 독이든 술을 마시게 했다. 날이 밝아 효혜제가 환궁했을 때는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후 조왕으로 회양왕인 유우(劉友)를 조왕(趙王)으로 삼았다. 그해 여름 조칙을 내려 큰외삼촌인 여택(呂澤)을 추서하여 영무후(令武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여태후가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파고 벙어리가 되게 하는 음약(瘖藥)을 먹인 뒤 그녀를 변소에 내다 버려 그곳에서 기거하게 했다. 여태후는 그녀를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며칠 후 여후는 혜제를 불러 '사람돼지'를 구경시켰고 혜제는 보고서 누구냐고 물었다. 한참 후에야 혜제는 그것이 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 놓아 울었다. 이때부터 혜제는 병으로 몸져 드러누워 1년 내내 일어나지 못했다. 혜제가 어머니 여태후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이는 사람이 할 짓이 못 됩니다. 나는 태후의 아들로써 천하를 다스릴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혜제는 온종일 술과 여자에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결과 병을 얻게 되었다.
*. 여태후의 권력행사 이야기 (유방의 형제와 배다른 아들)
혜제 2년 기원전 193년,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혜제의 작은 아버지와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 혜제의 배다른 큰형이 조현을 위해 장안에 들어왔다. 10월 어느 날, 혜제는 여태후의 면전에서 주연을 베풀고 제도혜왕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혜제는 제왕이 자기보다 나이가 위인 형이기 때문에 가정의 예법에 따라 제왕을 상석에 앉혔다. 이를 보고 여태후가 진노했다. 여후는 사람을 시켜 독주(鴆酒) 두 잔을 따라 제왕의 면전에 놓도록 한 뒤 제왕에게 일어나 그녀를 위해 축수하라고 명했다. 제왕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축수하기 위해 일어서자 혜제도 따라 일어나 술잔을 들고 함께 여태후의 축복을 기원하려고 했다. 당황한 태후는 자리를 박차고 황급히 일어나 혜제가 손에 든 술잔을 손으로 쳐서 엎어 버렸다. 제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긴 나머지 그 술잔에 든 술을 마시지 못하고 만취된 것처럼 가장하여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물어 본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독주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태후를 두려워한 제왕은 장안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심에 싸였다. 제나라의 내사(內史) 사(士)가 제왕에게 권했다. 「태후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혜제와 노원공주뿐입니다. (노원공주는 장이의 아들 장오와 혼인) 지금 대왕께서 70여 개의 성을 보유하고 계신 데 비해 노원공주는 식읍으로 서너 개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보유하고 계신 봉지 중 하나의 군을 태후에게 바쳐 공주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게 한다면 태후께서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아무런 걱정 없이 봉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왕은 즉시 태후에게 성양군(城陽郡)을 바치고 아울러 공주를 왕태후(王太后)로 존칭하였다. 태후는 크게 기뻐하고 이를 허락했다. 그리고 제왕이 머무는 관저에서 주연을 베풀어 주고 한바탕 실컷 술을 마시게 하고 나서 제왕을 귀국하게 해 주었다. 혜제 3년 기원전 192년, 장안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혜제 4년에 이르러 절반 정도가 진척되고, 혜제 6년 마침내 완공되었다. 제후들이 황제를 접견하기 위해 서울 장안으로 모여들었고, 10월에 입조하여 황제에게 축하를 표시하였다.
차기 예고 여태후 실권을 누리며 유씨를 유린하고 여씨 천하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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