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임진왜란 : 무기력하게 서울 한성을 버리고 파천하는 선조

팡씨1 2019. 12. 4. 21:31

제목 : 무기력하게 서울 한성을 버리고 파천하는 선조

1.    오늘의 내용 개략 소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기마병을 이끌고 싸우다 장렬하게 목숨을 잃게 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왜군이 4 13일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이래로 파죽지세로 불과 20일 만에 약 600Km가 넘는 거리를 밀고 서울 한양까지 5 3일 도착하게 되자 당장의 대안과 대책이 없었던 조선 선조 임금과 일부 대신들이 도성 서울을 포기하기로 하고 급히 서둘러 북쪽 파주를 넘어 개성으로 피신하는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    주요 핵심 포인트

선조는 파천을 결심함으로써 훗날 다시 서울 도성을 수복하고 조선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명나라의 도움과 임금과는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조선 의병 활동에 나선 의로운 백성들의 공이 크지만 말입니다.오늘 역사 이야기는 조선 왕조가 창건된 이래 200년가량 오랜 평화를 누려왔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놀라운 사건과 사변 인지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위기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선조 임금의 파천 (몽진) 결정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국가 최고 책임자로서 왜군을 상대로 결사 항전을 펴야 했었는지…. 한 번쯤 오래전 역사적 사실을 두고 “만약에 무엇 무엇 했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을 던져주는 화두라고 생각됩니다.

자 그럼 오늘 역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3.    책 내용 속으로

1.     충주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 왜군의 움직임

충주에서 승리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사이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지만 이제 남은 서울 한성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싶은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자기는 서울까지 다른 길로 가고 싶다며 안내 병 한 명을 요청한다. (당시 대마도주를 사위로 두고 있던 고니시가 조선 지리 사정을 잘 아는 병사들은 모두 독점하고 있었던 이유입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서울에 먼저 입성하려는 욕심에 그 날 한밤중에 몰래 먼저 출발합니다. 이를 알고 고니시 유키나가도 곧바로 출발을 해서 아예 기마병 만을 이끌고 먼저 서울을 향해 신속히 이동합니다.

 

2.     왜군 상경이 빨라지자 조정 내 돌아가는 움직임과 도성을 버리고 일단 북으로 (선조의 파천)

이일이 상주에서 패전하고 그나마 믿었던 신립 마저 탄금대 충주 전투에서 패전하고 사망했다는 소식이 서울 도성 안에 퍼지자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도성은 경비초소(성가퀴) 3만 개소가 넘었는데 초병은 7천 명뿐이어 부족했다 하고 (초소 내게 걸러 한 명 배치 수준) 그나마 병사들도 오합지졸이어서 중간 간부들이 뇌물 받고 도성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막기는커녕 열어주고 군사가 도망가도 관원은 모르고 있고 군기가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도성 안 백성들은 성 밖으로 빠저 나가려 안간힘을 씁니다. 밧줄을 내려 도성을 내려가고, 성 안에서는 도적들이 들끌며 약탈과 부녀자 겁탈을 하고 불안한 사람들이 사재기를 하니 물건이 동나고 가격이 급등합니다. 여러분 만약 오늘날 전쟁이 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먼저 챙기겠습니까? (, , 식량 쌀, 라면 개인 무기 또는 화기 등등) 이 시대 때는 무엇을 가장 먼저 챙겼을 까요?..... 바로 은과 미투리(짚신)입니다. 은은 당시에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현금과 같았고, 전쟁을 피해 멀리 피난 가기 위해서는 짚신이 반드시 필요했고 그러니까 신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겁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받은 선조는 조정 대신과 백성을 진정시키려고 “백성이 짚신을 사들이는 것은 가족 중에 싸움에 나가는 사람에게 챙겨 주려고 사는 것이고 은은 전쟁이 나기 전부터 사들이던 것이다. 임금인 나도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내가 가면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말은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 이전에 이일이 상주에서 패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때부터 이미 궁궐 안에서는 궁을 버리고 서울을 뜨자는 의견이 돌았고 이일이 패전했을 때 까지는 궁 밖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때 임금님이 타는 말을 관리하는 사람이 영의정 이산해를 만나러 대궐을 들랑 달락 하자 눈치 빠른 유성룡은 ‘임금이 뜨려나’ 하는 직감을 하게 되었고 한편 임금님 비서실장인 도승지 이항복이 자기 손바닥에 ‘입마영강문내’(영강문 안에 임금님 말을 세워둬라立馬 永康門內)라는 글을 써서 슬쩍 보여주니까 이제 확실히 임금이 도성을 빠져나갈 준비를 한다는 것을 유성룡은 먼저 알게 되었던 거죠. 사실 선조는 신립이 패하고 사망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피난 계획(파천播遷)을 확정 짓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신들은 종묘사직을 말하며 파천을 거두라 청하고, 일부 대신은 자기 조상과 위패도 서울에 있는데 가려면 왕이 나가시고 자기는 절 때 따라갈 수 없다며 반대하고 심지어 임금 전하께서 도성을 버리고 떠나면 민심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전하의 가마를 메고 따르던 사람들도 가마를 버리고 달아 날 것이라며 하나 같이 파천을 반대합니다. 그러자 얼굴이 경색된 선조는 다시 내전으로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이때 오직 영의정 이산해 만 “옛날에도 왕이 피난한 사례가 있다”며 일단 파천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니까 나머지 사헌부 사간원의 대신들은 모두 선조에게 “영의정 이산해를 파면시켜야 합니다.”라고 청하지만 선조는 버티고 있는 겁니다. 상황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신하들은 그럼 일단 세자라도 책봉하고 만약을 대비하자고 청하니까 선조는 자기는 장자이면서도 민폐를 끼치는 임해군 보다는 행동거지가 바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선포는 했지만 난리통이라 책봉 의식은 치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어 신하들이 왕자들을 동원시켜 민심을 수습하자고 선조에게 올리니 선조가 승인을 합니다. 이때가 신립이 충주에서 패전한 당일 4 28일 다음날입니다. 긴박하게 의사결정을 하게 된 것이죠. 4 29일 선조는 도성을 지키기 위해 대장으로는 우상 이양원을, 좌위장에 이전을, 우위장에 변언수를 각각 선임하고 박충간(수비 중 도망하여 파면)을 경성 순검사로 삼습니다.

그리고 한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도원수로 상중이었던 김명원을 임명하고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도강하는 왜군을 대비토록 합니다. 여러분….. 이때 한 나라의 최고 책임자이었던 선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이 선조 임금이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저 같아도 일단 선조와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전의 잘잘못을 차지하고 당장은 파천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지요.

이씨 조선 종실 문중에서 찾아와 종묘사직을 거론하며 극구 파천을 반대하자 선조는 종묘사직을 두고 절대 떠나지 않는다며 계속 속이고 한편으로는 윤두수에게 행차를 호위하게 지시하고 왕자들 중 세자인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동행하고 임해군은 김귀영, 윤탁연과 함께 함경도로, 순화군은 황정욱과 황혁, 이기와 함께 강원도로 떠나도록 지시한다. 나중에 순화군도 임해군을 쫓아 함경도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왕자들을 흩어지게 하는 제안은 유성룡이 제안하여 실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조가 파천을 결심한 것은 일단 몸을 피해서 평양까지 옮겨가서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전쟁을 막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제찰사인 류성룡이 도성에 남아 지키기로 되었던 것을 도승지 이항복이 임금이 북으로 변경까지 가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면 똑똑한 사람이 대응해야 하는데 유성룡 만한 사람이 없고 또 도성이 임금이 떠나기도 전에 이미 텅텅 비었는데 남아 있어야 죽음밖에 없고 공도 올릴 수 없는 상황이니까 임금을 따라나서야 한다고 선조에게 고하니까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유성룡은 선조를 따라가고 대신 이양원이 도성에 남게 된 것입니다.

4 30일 밤 이일의 장계가 도착해 보니 오늘내일 안으로 왜군이 서울에 이를 것이라고 쓰여 있자 임금은 주저하다가 서쪽 돈의문으로 도성을 빠저 나가며 사당의 관리자에게는 종묘 신주를 모시고 가라고 이릅니다. 그러자 관리인은 인장은 챙기고 신주는 땅에 묻고 따라나섭니다. 왕과 세자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고 왕비는 걸어서 인화문을 나와 가마를 탑니다. 일행은 다해 일백 명 내외… 수도 한성을 떠나기가 무섭게 임금과 행차 일행은 도성에서 불길이 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물을 두었던 도성 안 창고가 먼저 백성들에 의해 털리고 관노비 개인 노비 문서를 보관했던 형조가 있던 건물이 불타고, 대궐 창고는 약탈되고 난 후 불에 타고, 서울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립니다. 결국 역대 귀중한 물건과 서적 기록물 등등은 모두 불타 소실되고 맙니다. 왜군이 들어와 불 지른 것도 아니고 임금이 도성을 빠져나간 사실을 알게 된 화난 백성과 굶주린 백성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봄비가 주룩주룩 처량하게 내리는 상황에서 벽제 즈음 도착해서 경기 감사 권징이 마중 나와 선조에게 비옷을 챙겨줍니다. 궁녀 등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질퍽거리는 길을 푹푹 빠져가며 따라갑니다. 임진강 나루터에 도착해서 날이 어두워지자 강 남쪽에 있는 승정을 불태워 강을 밝히고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갑니다. 강을 건너면서 왜군이 쉽게 넘어올까 두려워 임진강 나루터도 파괴하고 남은 배들도 모두 가라앉히고 출발을 했다고 합니다. 625 때 북한 인민군의 남하 속도가 두려워 서울 민간인이 피난할 틈도 주지 않고 한강 다리를 폭파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생각났습니다. 행차 일행이 강을 건너서 겨우 임금님 수라상을 준비했는데 호위 군관들이 임금이고 뭐고 배가 고파서 선조의 밥도 다 먹어 치워 버렸습니다.

조선 건국 이래 200여 년 평화롭게 지난 터라 군관들이 군기가 빠져서 규율이고 뭐고 통제가 되지 않음을 그러니까 임금님 밥마저 훔쳐 먹는 것을 임금인 선조가 직접 당하고 나서야 느낀 모양입니다. 다시 개성 다 와서 판문에 도착해서야 겨우 점심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5 1일 저녁이 되고 나서 개성에 도착합니다. 이때 함경남도 병사 신할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선조를 호위합니다. 여유를 좀 찾은 선조는 그곳 백성들의 민원을 들어보고 어려운 백성의 사정에 대안 조치를 하명하니까 따라간 신하들이 아부 떨듯이 개성 지역 백성의 부역과 조세 감면을 건의합니다. 전쟁으로 도피 중에 할 일은 또 합니다. 이때 개성에 도착한 대신들은 또 국난의 책임을 전가하는 다툼을 서로 벌이다가 임금 아래로 가장 높은 영의정 이산해에게 책임을 묻고 그의 벼슬을 빼앗는 것으로 결론을 냅니다. 개성에서 도성에서 종묘의 신줏단지를 들고 따라온 무리와 황해도에서 징병한 군졸들 간에 누가 밥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싸우다가 이를 알게 된 선조가 신줏단지를 들고 따라온 수복 몇을 목 베어 버리라고 명하고 베어버리자 잠잠해집니다. 고관대작(高官大爵) 신하들뿐만 아니라 낮은 관직의 종들도 상황 판단을 못했던 거죠. 동부승지 이곽이 말하기를 이번 난리는 왕자궁에 있는 사람들이 비리 및 왜구와의 한통속 등등 많은 폐단에서 비롯되었다며 왕자궁 안의 내수사들을 목 베야 한다며 비난을 하고 선조는 조사하고 처리하라 명한다. 이 이곽은 한양 도성을 나올 때 옥에 가둬놓은 흉악범 도적 등등 죄수들을 도성 안에 풀어버려서 혼란을 야기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조는 경상 감사 김수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등 모두를 싸잡아 알만한 자들이 모두 전쟁을 피해 도망갔다며 원망의 말을 늘어놓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선조가 책임져야 할 일 아닙니까? 휘하 관리들만 잘 못이 있고 임금은 책임이 없다는 식의 말을 하니 지금 같아서는 탄핵 감이었던 선조이었던 거죠… 그러면서 본인 책임 이라고는 “명나라를 깍듯이 섬기느라 미친 왜적들에게 불만을 사기 때문이다.”라며 역시 명나라 탓을 합니다.

 

 

3.     도성을 함락 당하다. (5/3)

충주에서 승리 한 왜군은 일부 정찰병을 조선인으로 위장시켜 한성에 잠입시켰고 이미 선조가 수도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이동한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일본 1군은 충주에서 양지 용인을 거쳐 한강으로, 2군은 여주 이천을 거쳐 용진으로 올라와 한강에 다다릅니다.. 도성을 지키라고 명 받은 이양원 도망, 한강을 지키라고 명 받은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 강 넘어 왜군이 도하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바로 말에 안장을 얹자 휘하 군사들이 이를 보고 장수보다 먼저 도망… 말이 됩니까? 한강을 넘은 왜군이 지금의 동문인 홍인문까지 왔더니 도성 문도 활짝 열려 있고 혹시 매복이 있나 하고 정탐병을 몇 번 보내고는 완전히 빈 것을 알고 입성했는데 궁궐은 이미 불에 다 탔기 때문에 왜군이 묵을 만한 곳이 없어 일단 종묘로 이동해 기거를 했는데 그곳에서 귀신이 나온다며 자기들끼리 놀라 칼부림 몇 번 하더니 두려워서 종묘를 불태우고 다시 남쪽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합니다. 왜군은 도성이 텅 빈 것을 보고 증명서를 조선인들 백성에게 배포하고 증명서를 내보이면 도성 안에 돌아와 살아도 해 꼬지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 숨거나 도망쳤던 백성들이 다시 도성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왜구 편에 서서 길안내 또는 이적 질을 했다고 합니다. 왜군은 고발 접수처를 만들고 실행하니 이를 악 이용하는 조선 백성도 많았다 합니다. 이때 왜군들도 그동안 부산에서 서울까지 행군하느라 발이 모두 부르트고 걷지도 못할 정도로 일부 백성은 막대기 하나만으로도 왜군을 이길 수 있겠다는 비아냥이 있었다 합니다.

 

 

4.     일본이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한 서울 점령 과정

누구보다 서울 도성에 먼저 입성해 공을 세우고 싶은 가토 기요마사는 아침 일찍 몰래 먼저 서울을 향해 출발해 죽전과 양지 용인을 거쳐 한강 남쪽에 다다릅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고니시 유키나가가 날랜 병사 20여 명을 한강에 먼저 도착시켜 가토가 도강할만한 배를 먼저 강으로 흘려보내 버렸고 뒤늦게 도착한 가토의 군대는 한강을 건널 배가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강 건너 조선군 깃발과 병사들이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만 보입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한강 이남에 있는 새들이 자유롭게 강북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강북의 조선군은 가짜 허수아비라며 자기 부하 몇 명을 선발해 수영으로 한강을 넘게 해서 강북에 정박하고 있던 배를 탈취해서 강남으로 몰고 온 후 다시 그 배를 타고 한강을 넘어 남대문을 통해 도성에 고니시 유키나가보다 먼저 입성했다고 가토 기요마사의 전쟁 이후 쓰인 그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니시는 고니시대로 가토는 가토 대로 각자 자기가 먼저 서울에 입성했다고 쓰고 있으니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가토가 에도시대를 시작하는 세기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를 누르고 승리했으니 승자의 기록으로서 가토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충주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몰래 먼저 출발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고니시는 기마병만을 착출해 기동력 있게 여주 이천을 거쳐 용진으로 들어와 서울 동문(홍인지문)에 도착해서 문이 닫혀 있자 조총 총구로 문틈을 쑤셔 열고 들어갔다고도 하고 성벽을 타고 넘어가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우리 선조실록 기록에는 문이 열려 있어 왜구가 자연스럽게 입성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5 3일 오전 한성에 입성했던 왜군은 처음 부산으로 넘어왔을 때 동래성과 부산진성에서 조선인은 군민을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도륙을 했던 모습과는 달리 자기 일본군들에게 조선인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말 것을 엄격하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민심 수습의 일환으로 행한 것이겠죠. 한양을 불태우고 떠난 선조와 달리 입성한 왜군이 양민을 학살하지 않고 도성 안 조선인을 해치지 않자 조선 백성은 오히려 고두밥을 지어주는 둥 일본 병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되려 이런 조선인들의 호의에 왜군이 감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날 정오 넘어 뒤늦게 숭례문을 통해 입성한 가토 기요마사는 자기가 고니시 유키나가보다 한발 늦게 입성한 것에 억울해하며 일단 일본 나고야성에 있는 태합(노관 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두 사람 이름으로 한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알리자고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만약 가토 기요마사가 먼저 입성하고 자기가 늦게 입성해서 자기가 부탁하는 상황이 었다면 당신은 나의 부탁을 들어주기는 어림도 없었을 것 이라며 단칼에 거부합니다. 이렇게 고니시에게 거절당한 가토는 아예 자기 혼자 서울을 점령한 것처럼 편지를 써서 노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띄워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때 고니시는 아예 자기 부장 대마도 사람 곤노스케를 아예 노관백에게 보내서 인편으로 보고해 버립니다. 얼마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토의 허위 보고를 보고는 가토를 질책했다고 합니다. 이때 조선에 넘어온 왜군은 14만 명이었고. 그 해 난리통에 백성들은 농사는 포기했고 그나마 보리도 제때에 추수하지 않아서 조선 백성은 물론 왜군까지 식량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일본 기록에 보면 이때 조선인 일부는 마치 일본인 인양 머리를 깎고 같은 조선 사람들을 약탈하는 자고 많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본의 입장에서 일본 편드는 친일파가 있듯이 그 뿌리가 아직도 이 땅에 공생하고 있는 거죠. 서울 도성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전달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제 확실한 조선 점령을 위해 일본 본토에서 조선 서해 바다를 이용해서 한강까지 곡물과 물자를 이동하면 앞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까지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직접 조선으로 넘어오고 일본 천왕의 거처를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옮기고 현재 일본 본토 관백으로 있는 자기 양아들 히데쓰구를 중국 관백에 임명하고 조선 왕으로는 히데쓰구의 동생 하시바 하데카쓰에게, 일본 관백에는 하시바 히데야쓰에 게 넘겨준다는 환상과 망상을 담은 사상누각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우선 장검과 갈색 말 한 필을 먼저 하사한다는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4.    인문학적 고찰

오늘 이야기 속의 일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세상에는 어디를 가나 같은 편이면서도 반드시 나를 시기하고 경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군과 적은 알아볼 줄 알아야겠지요.

오늘 역사 이야기에서 선조 임금과 그의 신하들이 과연 한 몸으로 움직여진다고 생각되십니까?

선조는 선조 대로 신하는 신하대로 각자 자기 생각만을 전달할 뿐 뚜렷한 대안을 세우지 못하고 그저 닥치는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최고 책임자도 현명하고 바른 판단 능력의 자질이 요구되지만 그 밑에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자질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우리는 선조 임금을 욕할 수 있습니다 왜냐 그가 최고의 지도자 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당시 선조 임금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에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라의 일은 결정은 최고 통수권자가 합니다. 하지만 나랏일을 꾸려가는 실무는 그 관료들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만 보지 말고 그 밑에 수행하고 따르는 자들의 인품, 성품, 자질, 능력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 올바른 선택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차기 예고

다음번 영상을 예고 드리겠습니다.

다음번 영상은 남해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첫 출전을 통해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 (1차 출전)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많이 기대해 주시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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