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사마천 사기 진시황 본기(2)

팡씨1 2019. 12. 8. 21:58

제목 : 진시황제의 업적과 5회 순행 – 진시황 본기(2)

   

오늘의 내용 개략 소개

 

통일 진나라 시황의 업적 / 진시황제의 봉선제와 전국 순행 & 불로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진시황의 출생 비밀과 유년시절 진시황의 성장 과정을 말씀드렸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중국 최초로 통일을 이룩한 진시황제에 대한 이야기 두 번째 시간으로

“진시황제가 전국 통일 이후 “황제로서 이룬 공적과 진시황의 순행”이라는 내용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1) 먼저 진시황의 업적과 공적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2) 진시황이 순행을 시작하며 태산에서 봉선제를 실시한 이야기 또

3) 진시황이 여러 차례 전국을 순행하며 이룬 이야기 특히 불로초 이야기를 해볼 거고요

4) 다음번 시간에는 진시황제의 최고의 악수 분서갱유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국을 치고 통일을 이루게 된 연유를 진시황 스스로 밝힙니다.

1.    책 내용 속으로

 

 

1. 진시황제의 주목할 만한 업적

(호칭과 명칭)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차원에서 6국을 멸하게 된 사유를 (한나라 : 나라를 진에 바치기로 약속하고 후에 조위와 연합해서 진을 공격하니 멸망시켰다. 조나라: 맹약해서 볼모로 있던 왕자를 돌려보냈더니 오히려 대나라 땅으로 옮겨서 반항하니 공격하여 멸망, 위나라 : 역시 진에 복종하는 척하다 한, 조와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니 멸망, 초나라는 진나라 남군을 공격하니 그 대가로 공격하여 멸망, 연나라는 태자가 나를 암살하려 했으니 공격하여 멸망, 제나라는 외교 관계를 끊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서 멸망시켰다.) 즉 하나같이 다른 제후국들이 진나라와의 맹약을 깨고 배반 행위를 해서 응징 차원에서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정복의 당위성을 나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통일 업적은 자기 조상의 혼령이 도와준 것이라 말하며 승상 왕관, 어사대부 풍겁, 정위 이사 등에게 자기가 전국 통일을 이룬 만큼 자기 공적에 어울리는 호칭을 정해 보라고 명합니다.

‘황제’라는 칭호가 만들어진 이유 : “고대에 千皇, 地皇, 太皇 이 있는데 이중 으뜸이 태황이니 태황이라 하세요, 부를 때는 命은 制, 천자 스스로를 부르 때는 짐()이라 하세요”라고 올리니 진시황이 스스로 그럼 태()자는 빼고 황() 자를 쓰고, 상고시대 오제(복희, 신농, 황제, 당요, 우순)으 호칭인 제()를 써서 황제(皇帝)라고 부르라고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부를 때는 짐이요 넘이 부를 때는 황제라 호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죽은 선대의 조상들 시호를 정하는 것도 없애 버립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첫 번째 황제니 시황제, 그리고 그다음 후세붙터 순차적으로 이세, 삼세, . 만세까지 전하게 합니다.

이세는 호해요 삼세는 자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통일 진나라는 15년 만에 백성 봉기에 의해 결국 멸망한 것 아시죠….. 부자가 삼대 못 간다는 말처럼 통일 진나라는 삼대를 못 갑니다.

 

(나라 통치 기준)

중국의 五德 (오행:처음과 끝 화수목금토) 중 고대 황제 때는 토덕, 하 왕조는 목덕, 은 왕조는 금덕, 주 왕조는 화덕인데 주나라의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한다는 차원에서 수덕(水德)으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황하 강도 덕수로 부르고 한 해의 시작도 1월이 아닌 10월로 바꾸고 의복들 깃발의 색은 검은색으로 바꾸고 진나라 백성을 호칭할 때도 ‘검수(黔首)’ 검은 머리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숫자는 6을 숭상해서 수레 너비도 6, 여섯 자를 1()로 수레 한대에 6마리가 끌게 하고 법을 엄격히 시행합니다.

통일 후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당시 승상인 왕관이 제후국을 다스리기 위해 자제(왕자)들을 먼 제후국에 임명하여 봉건국가 실현을 주청 했지만 오직 정위였던 이사만 주나라 때처럼 자제들에게 분봉하면 훗날 후손들끼리 싸우고 분쟁만 하니 그땐 막을 수도 없고 제후를 두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건의를 합니다,. 이소리를 듣고 진시황이 정위 이사의 말이 올다고 받아들여 결국 나라를 36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 (군수:행정관료), ()(군위:경찰청), ()(감군:감독원)을 두었다.

 

(통일 후 각종 개혁과 변화 내용)

도량의 무게와 길이 통일 : 경제적 효과 증대를 예측할 수 있다. 특히 거래 활성화 물류 증대

수레바퀴의 폭 동일화 : 표준화의 효과

문자의 통일 : 소통과 정보 전달 속도 향상 (문자 형태 소전(小篆) 예서(隸書) 등등 글자 형태의 다변성을 행정상 필요한 공식 문자를 쓰게 하지 않았을까)

전국 부호를 함양으로 이주시킴 (12만 호)

위수 남쪽에 상림원, 장대궁 및 제후국을 멸할 때마다 그곳 건축 양식으로 궁궐을 여러 채 지었고 궁과 궁 사이를 구름다리와 주각으로 연결하고 여러 제후국의 많은 미인과 종 및 북으로 궁을 채워 놓았다.

 

BC220

위수 남쪽에 신궁을 짓고 극묘(極廟)로 이름 짓고 감천궁을 짓고 극묘부터 여산까지 용도(길 양쪽 담장 쌓은 도로)로 연결, 치도 (직진도)를 닦기 시작

 

진시황제의 순행 일지

1차 순행 BC220 :

함양에서 가까운 서북 쪽 농서와 북지를 순행하고 돌아옴.

2차 순행 BC219 :

동쪽으로 노나라 추역산 오르고 태산에서 봉선제 하늘에 제사를(사기서에는 제나라 노나라의 유생들을 이끌고 올랐다가 비가 와서 나무 밑으로 몸을 피하고 제대로 봉선제를 못했다고 합니다. 이때 유생들이 비웃었다고 전합니다. 진시황제가 나중에 갱유를 하게 된 시발점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하필 함양에서 뚝 떨어진 태산까지 와서 봉선제를 실시했을 까요?) 올리고 양보산에서 땅에 제사 올리고 비석 세우고(주로 통일을 이룬 업적과 백성을 보살피고 열심히 가르치는 황제임을 부각한 비석), 동쪽 황연과 추연을 들러 남쪽 낭야까지 와서 비석 세우고(통일 후 업적을 기록 농업 숭상, 풍습 통일, 도량 문자 통일, 지방관직의 안분, 신분의 존귀 확립. 차별 차등 철폐, 도적 퇴치 평화로운 통치 공덕 부각한 비석) 제나라 지역 동해 가까이 와서 서불이라는 사람이 바닷속 삼신산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에 신선이 사는데 말하자 서불을 보내 신선을 찾게 했다. 그 서불이 제주도 정방폭포까지 와서 나 다녀감이라고 바위에 글을 세겼다고 하죠 (서불과차). 진시황이 다시 방향을 돌려 돌아오며 팽성에 와서는 사수에 빠진 주정(하나라 우임금이 만든 아홉 주를 상징이며 대대로 천자의 나라가 물려오다 진나라가 옛 주나라를 멸하고 빼앗아 한양으로 옮기다 사수에 빠뜨림)을 찾고자 천명을 물에 들어가 찾게 했으나 실패. 회하를 넘어 형산과 남군에서 장강을 타고 상산으로 갔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 며칠을 이동하지 못하자 상산의 상군(湘君)이라는 신에 대해 박사들에게 물으니 요임금 딸이며 순임금의 아내인데 상산에 묻혔다고 말하자 자기가 황제인데 황제의 나아갈 길을 방해한 죄를 물어 죄수 3000명을 동원에서 상산 전체를 벌거숭이 산으로 만들고 무관을 거쳐 함양에 돌아왔다. (지도와 함께 이동 경로 설명)

3차 순행 BC218 :

동쪽 유람 : 양무현 박랑사에 들렀을 때 도적떼 습격을 받아 크게 놀랐고 도망친 도적 떼를 잡기 위해 수배령을 내렸다. 지부산(동쪽 바다가 보임)에 올라 비석을 남기고 동관에 비문을 남기다. (통치를 너무 잘해 백성과 관리가 모두 비석 세우기를 간청했다고 적고 있다 (낭야들러 상당을 통해 함양으로 복귀) 다음 해 신분을 숨기고 무사 네 명과 밤에 외출했다가 강도를 만났으나 무사했다 이후 20일간 관중을 샅샅이 뒤졌다.

4차 순행 BC215 :

연나라 갈석으로 갔다가(연나라 사람 노생을 만나 신선을 찾게 했다.) 비문을 남김( 성곽을 헐고 제방을 헐어 막힌 길을 통하게 했고 백성을 평온하게 했다.) 한종, 후공, 석생을 시켜 불로초를 구하도록 했다. 상군 길로 돌아옴. 연 사람 노생이 신선을 찾아 바다에 나갔다 돌아와 귀신에 관한 녹도서(예언서)를 바쳤는데 거기에는 “진을 망하게 할 자는 胡이다”라고 쓰여 있자 이는 북쪽 호인 (오랑캐)라 생각하여 몽염 장군을 시켜 30만을 이끌고 오랑캐 호인을 티고 하남 땅을 점령했다. 시황 33년 죄인 노비 장사꾼 등을 징발해 중국 남쪽 계림, 상군, 남해를 점령하고 죄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서북 쪽으로는 흉노와 융족을 를 막았다.

5차 순행 BC210 :

진시황의 마지막 순행입니다. 초 오 나라 회계와 낭야를 들렀다 사구에서 사망하다.

 

여기까지 순행 일정을 말씀드렸는데요 마지막 순행은 분서갱유 및 아방궁 직진 도로 등과 함께 다음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    인문학적 고찰

 

 

오늘 진시황제의 업적과 공정 그리고 순행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으셨습니까?

첫째는 대단한 성과를

둘째는 그런 성과를 올리기 위한 백성들의 노고를

셋째는 권력을 잡은 사람이 그 권력을 위지 하기 위해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압박과 무소불위의 권력 압에 눈치와 무사 안일로 나아가는 위정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3.    오늘의 핵심 주제 리뷰

 

 

 

4.    차기 예고

 

 

다음 시간에는 분서갱유 및 아방궁 건축과 직진 도로 건설과 함께 마지막 5차 순행 과정과 도중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과 호해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