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진시황 본기 4부

팡씨1 2019. 12. 18. 23:36

제목 : 진시황제의 죽음과 황릉(4) – 진시황 본기

   

오늘의 내용 개략 소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진시황의 독재권력이 부른 과오 즉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대한 이야기와 절대권력을 등에 업고 직접 신선이 되고자 했던 이야기를 말씀드렸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진시황제가 마지막 순행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과 시황제를 안장한 여산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잠깐 이야기에 들어가기전에 여러분께 진시황제를 안장한 여산릉에 대한 질문 한가지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산의 황제릉을 발굴한다면 진시황제의 유해는 미라로 존재할까요?.... 진나라 다음을 이었던 한나라 서한 시대의 한 귀족 부인이 미라로 발견되었던 사건을 여러분들은 아시는지요?... 그 사건은 ‘마왕퇴묘’라고 불려집니다.….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발굴된 여러 미라는 모두 죽은 사람의 속 내장은 비워졌고 겉 가죽만 썩지 않도록 처리되어 매장되었던 건식 미라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한나라 시대의 묘 마왕퇴에서 발굴된 미라는 그 시신이 건조되지 않고 생체를 그대로 유지한 체 2100년을 무덤 속에 보존되어 오다가 1971년 발견되어 발굴되었습니다.

부검 결과도 놀라웠습니다. 이름은 ‘신추’ 부인, 죽은 그녀의 나이는 50세 정도, 그녀의 내장 상태는 완벽했고, 혈관 속 피를 분석했더니 혈액형은 A형으로 나왔습니다. 이를 통해 신추 부인은 동맥경화, 담결석, 당뇨병, 심장병, 고혈압, 허리디스크, 비만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그녀가 50세쯤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했으며 참외 씨가 위장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여름철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진나라를 이은 다음 왕조는 한나라입니다. 근접했던 진나라와 한나라 연대를 생각한다면 귀족 부인의 묘가 이 정도인데 하물며 황제였던 시황제의 시신과 묘는 어떠할까요?..... 과연 진시황제는 현재 미라로 존재할까요?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시황제는 절대 미라로 존재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마천 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시황제는 전국 순행 중 사망하게 되고 함양 수도까지 운구 도중 이미 부패되고 2달 정도 지난 이후에서야 여산에 묻히게 되었으니 말이죠…

 

자 그럼 오늘 내용인 진시황이 죽음을 맞게 되는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 순서는

1) 먼저 진시황의 죽음을 사전에 예견 했었던 내용과

2) 진시황제의 마지막 5차 순행 일정을 따르며 마지막 죽음을 맞은 사건과 그의 사후 진시황의 묘지 여산릉이 어떻게 조성되었고 매장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사마천 사기 기록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    책 내용 속으로

 

(BC 211년 시황 36년 : 진시황 죽음에 대한 징조)

기원전 211년 시황제 사망 1년 전 입니다. 하늘에서 동군 지역에 별똥이 떨어졌는데 워낙 큰 유성이 떨어졌는지 그 잔재가 땅에 남게 되었는데 누군가 그 돌에 “진시황이 죽으면 땅이 나누어질 것이다” 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난 황제가 범인을 잡으려 해도 못 잡자 아예 그 동내 주민을 모두 죽이고 불태워 버린 후에 박사들을 시켜서 선진인시(仙眞人詩: 진시황을 찬양하는 신선 노래)를 짓게 만들고 순행하는 지역마다 악사들을 동원해 노래와 연주를 하게 만듭니다. => 한마디로 자기의 결점은 가리고 스스로를 신격화 시킨다음 백성들에게 세뇌 시키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했다고 봐야겠죠. 말하자면 독재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거죠. 독재자일수록 자기를 신격화 하기 위해서 동상, 노래, 찬가 등등을 만들어 내 잖아요. 이는 독재자들의 공통점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한 번은 진시황이 보낸 사자가 길을 가는데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서 벽옥(壁옥)을 내밀며 황제에게 가져다 주라며 “금년에 조룡(祖龍:조상의 용)이 죽을 것이다” 라고 말을 하고는 사라집니다. 여기서 조룡이란 아마 진시황제를 가르켰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사자가 황제에게 알리자 황제가 의미를 낮춰 말 하길 “산속 귀신은 원래 일 년 동안의 일만 안다. 그리고 조룡이란 사람의 조상을 말한다” 라 하고는 받았던 벽옥을 조사해보니까 시황제가 2차 순행할 때 장강에서 비바람을 만나 고생할 시점에 물에 빠뜨렸건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이 사건에 대해 점을 쳤더니 백성들을 이주시켜야 된다는 점괘가 나오자 북하와 유중 지역 사람 삼만 가구를 이주시키고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 줍니다. 이렇게 해서 대충 액땜을 한 것이죠

 

(PS : 여기서 잠깐 벽옥(화씨벽)의 유래)

여기서 잠깐….여러분 화씨벽(和氏璧)에 대한 이야기를 아십니까? 화씨벽은 고대 중국의 여러 제후 또는 황제 등이 욕심 내었던 귀중한 보석입니다. 지난번 올려드린 영상 중에서 인상여 열전에서(카드) 자세한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만 화씨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한비자》에 따르면 춘추시대 초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강가에서 귀한 원석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처음엔 초나라 여왕에게 원석을 진상해 바쳤지만 옥 세공인이 가짜 돌이라고 판정을 내리자 분노한 초나라 여왕은 오히려 변화가 왕을 가지고 놀려한다면서 변화의 한 쪽 다리를 잘라 버립니다. 시간이 흘러 여왕이 죽고 그 다음으로 무왕이 즉위하자 변화는 이번에는 귀한 원석을  무왕에게 바쳤는데 이번에도 역시 가짜라는 판정을 받고 나머지 남은 한 다리마저 잘려버리는 형을 받습니다. 얼마 후 무왕이 죽고 다음 왕으로 문왕이 즉위하자 변화는 또 옥을 바치려 했지만 두 다리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갈 수 없게 되자 원석을 안고 엉엉 울기만 합니다. 문왕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원석을 가져다 확인해 보니 과연 세상에서 가장 좋은 빛깔을 가진 옥으로 판명되었고, 문왕은 그것을 세공 시켜 도장을 만듭니다. 이때부터 이 도장은 도장을 찍는 용도가 아닌 천자를 계승할 때 권력의 일인자라는 의미를 갖는 귀중한 승계 물품이 되었습니다. 문왕은 답례로 변화에게 봉록을 내려 여생을 편히 살게 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이 화씨벽의 탄생 과정 입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전국시대에 와서는 화씨벽이 조나라 혜문왕의 손에 들어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진나라 소양왕 (진시황제의 증조할아버지)이 조나라 화씨벽과 진나라의 성 15개를 바꾸자고 조나라 왕에게 제안을 합니다. 사실 보옥만 빼앗고 땅은 내어줄 리 만무한 진나라 소양왕임을 조나라 왕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면 강대국인 진나라가 트집 잡아 조나라를 쳐들어올게 뻔한 판국이라 조나라 혜문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는데, 이때 인상여라는 사람이 자기가 직접 사신으로 진나라에 가서 소양왕에게 화씨벽을 바친 뒤에 다시 소양왕을 협박해(옥의 티를 찾아 주겠다며 돌려 받은 후 이판 사판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지 못할 바에야 화씨벽을 박살내겠다며 호통친 내용) 온전히 돌려받아 조나라로 돌아옴으로서 훌륭하게 일처리 한 공노로 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인상여 열전에서 했었죠. 인상여가 진나라 소양 왕에게 빼앗길 번한 화씨벽으로 만든 옥새를 고스란히 돌려받았기에 "완벽귀조"라는 말이있는데 이는 화씨벽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결국 조나라를 망하게 한 진시황은 화씨벽을 빼앗고 스스로 천자가 되어 황제로 등극을 합니다. 그런데 옥새는 두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전옥’이라 해서 전국 옥새인데 이것은 전국을 통일한 인장용 옥새이며, 두번째는 화씨벽으로 만든 천자의 옥새 즉 천자라는 상징을 갖는 옥새인 것이죠.

이후에 화씨벽은 진나라가 망하고 전한 시대 한나라 황제의 옥새가 되었다가, 전한 마지막 효원황태후 때 화씨벽으로 만든 옥새를 벽에 던져 깨뜨리는 바람에 그 뒤로 때워서 사용하게 되었고, 그 뒤 후한과 위나라, 서진, 동진, 수나라, 당나라를 거쳐 주~욱 내려오다가 기원후 900년 전후로 오대십국 시대에 후당시대 왕 이종가의 매부 석경당이 요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후당을 치자 후당 마지막 황제였던 이종가가 천자 옥새 (화씨벽)를 끌어안고 분신 자살한 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화씨벽으로 만든 도장은 단 하나로 천자의 계승 용도이었습니다.화씨벽 이야기는 기원전 700년대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 변화가 발견한 이후 기원후 900년경 당나라 말 까지 약 1600년간 물려 내려오며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BC 210년 시황 37년 : 진시황제의 마지막 순행과 죽음)

자 그럼 이번에는 진시황제의 전국 순행 중 마지막 순행이 되는 5차 순행의 여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시황제 37년 기원전 210년 10월입니다. 좌승상 이사와, 막내아들 호해가 자기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청하니 황제가 막내를 이뻐해서 함께 데리고 순행을 시작합니다. 이때 어릴때부터 호해에게 학문과 법을 가르치던 환관 출신 조고도 함께 수행하게됩니다. 이번에는 과거 순행 때와는 달리 옛 초나라 지역을 먼저 돕니다. 11월에 옛 초나라왕이 사냥을 즐기던 운몽이라는 곳에 도착해 구의산에서 순임금의 제사를 올립니다. (구의산은 옛 상고시대 순임금이 남쪽을 순행하다 붕어한 곳 입니다.) 그리고 장강을 따라 적가?, 해저를 지나 단양, 전당에 도착하고 절강에 이르러 폭이 좁은 곳으로 이동해 회계산(우임금이 동굴로 들어간 곳)에 올라서는 하나라 1대 황제 치수를 잘 다룬 우임금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해를 바라보며 공덕비를 세웁니다.

이 공덕비 비문에는 진시황제가 생각하는 여성과 남성에 대한 관념이 담겨있습니다. 먼저 여성상입니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식이 있는 여자가 남편이 죽고 나서 다시 시집을 가면 죽은 남편을 배신하는 것이니 이는 정조가 없는 것이다” 또 정조에 대한 관념도 남깁니다. “내외 관계에도 적절한 거리를 두고 음탕함을 금지하니 남녀가 순결하고 진실해졌다” 또 바람직한 남성상도 기록합니다. “지아비가 유부녀와 간통을 하면 그자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또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눈 맞아 달아나면 그 자식들이 그녀를 어머니로 인정해서는안된다.” 결국 남녀 관계의 정조 및 풍속을 맑게 하는데 신경을 썼다 이런 내용인데 이 같은 남녀에 대한 진시황제의 가치관은 그의 어머니 조희가 저지른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망상이 떠올라서 그리했던 것 같습니다.

회계산에서 다시 돌아가는 길은 오현을 지나 강승현 강을 건너 낭야에 이릅니다. 그 곳에서 불로초를 구하러 멀리 동해를 다녀온 서불을 만납니다. 서불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고도 성과를 내지 못하자 황제의 문책이 두려워서 황제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불로초를 구할 수는 있는데 바다에 커다란 상어가 도사리고 불로초 찾기를 방해한다며 이런 상어를 잡기 위해서 활 잘 쏘는 사람과 동행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때 마침 진시황이 꿈을 꿨는데 꿈에 해신과 싸우는 꿈을 꿉니다. 꿈 해몽가가 진시황에게 해신은 사악한 귀신이라고 말하며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전합니다. 결국 이 말에 진시황은 활 쏘는 사람을 부쳐서 출발 하도록 하고 스스로도 직접 큰 활을 들고 큰 상어를 잡으러 바닷가로 향해 낭야에서 북쪽 영선산까지 올라갑니다. 이동해 가면서 계속 물고기 찾기에 실패하다가 지부산에 이르러 큰 물고기가 나타나자 황제가 직접 화살을 쏘아 물고기를 잡아 죽입니다. 이제 불로초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만족해합니다. 그리고는 돌아서 순행을 계속하다가 서쪽 평원진에 도착했는데 몸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이때 죽음을 직감한 황제는 서둘러 옥새를 찍어서 큰 아들 부소에게 “장례에 참여하고 함양에 안장하라”는 조서를 쓰고 밀봉한 후에 중거부령 조고의 관부에 두었다가 미쳐 사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7월 한여름에 사구 평대에서 죽습니다. 조서 내용 중에 ‘장례에 참석하라’는 말은 결국 큰 아들 부소에게 황제 권을 넘기겠다는 유서였죠. 하지만 결국 조서는 장남 부소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은 제가 영상 올려드렸던 이사열전과 몽염열전(카드)을 보시면 자세하게 설명 드렸으니 참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고와 승상 이사 그리고 막내아들 호해. 이 세 사람이 짜고 황제가 죽기 전에 남겨둔 조서를 바꿔치기하는 내용이죠 ‘다음 황제는 호해로 하고 큰 아들 부소는 자결하라’는 내용… 그리고 그들에게 정적이 될만한 몽염 장군도 역시 자결하게 만들고 전국을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진나라를 망국으로 내미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운 이야기….입니다.

 

시황제가 다섯 번째 순행을 하다가 길에서 객사한 꼴이죠…

여러분 여기서 문제 하나 내보겠습니다.

진시황이 왜 이렇게 갑자기 죽게 되었을까요?

1번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지 못해서

2번 시황제가 스스로 바라던 진짜 신선이 되지 못해서

3번 독단적으로 모든 국정을 다 참견하고 결정하느라 과로해서.

제가 볼 때 정답은 3번입니다. 진시황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 듯이 공문서, 그러니까 결재 서류를 하루에 빠짐없이 밤낮으로 백이십 석 무게에 달하는 죽간을 읽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순행하면서도 온량거에 오르면 서류만 본거죠…. 결국 진시황은 지금으로 치면 산업재해 1호 희생자였던 것입니다. 중국판 산재 1호 죠!... 산재 발생 원인은 ‘과로사’…. ‘세상을 모두 자기 아래에 두려고 했던 과욕….욕심이 부른 과로사’ 였던 거죠.

 

때마침 여름이고 빠른 시일 내에 함양 수도에 당도해야 하니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합니다. 사구에서 급히 출발해 훗날 초한전 때 한신이 배수진으로 조나라 진여를 박살 냈던 정형 땅을 거처 진직도가 뚫려 있는 구원에 당도합니다 그리고는 진직도를 따라 함양까지 내려오는데 마침 한 여름이라서 황제의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작당한 몇 사람만 빼고 순행하는 다른 모든 일행에게는 황제가 죽은 것을 모르도록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관원에게 소금에 절인 말린 고기를 온량거에 싣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썩은 내가 고기 썩는 냄새인지 황제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인지 알지 못하도록 한거죠.

마침내 함양에 도착해서야 황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막내아들 호해가 제2세 황제로 제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9월에 그간 황제가 등극할 때부터 준비했던 여산릉에 진시황제를 안장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진시황릉 여산 능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진시황릉의 구조와 형태)

진시황릉을 건축하는 데 제위 이후부터 시작해서 37년 동안 약 70만 명을 이주시키고 그들을 동원해 건설했다고 합니다.

땅을 깊이 파고 거기에 구리를 녹여 붙고 틈을 없애 외관을 설치하고, 내부에는 궁관, 관원, 기이하고 특이한 물건을 가득 보관하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기술자를 시켜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과 화살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수은으로 물처럼 내, 강, 바다를 이루게 하여 땅을 형상화하고, 하늘에는 천문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오랫동안 불이 꺼지지 않게 사람 모양으로 물고기 기름을 이용해 초를 만들어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세 황제 호해가 아이가 없던 진시황의 후궁들은 모두 함께 순장 시키고 또 릉을 건축하면서 기술적 비밀을 알고 있었던 기술자들 하고 숨겨진 보물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혹시 비밀을 누설할까 해서 그들 모두를 장례가 모두 끝나자마자 못 나오게 메인 통로의 문을 닫아걸고 또 사잇문까지 잠가서 그들 모두를 함께 매몰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여산릉이 황제의 묘지처럼 보이면 도굴 당할까 두려워서 봉분처럼 보이지 않도록 그 묘지 위에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위장해 놓았다고 사마천은 진시황 본기에서 기록 해 놓고 있습니다.

 

 

오늘 서두에 지난1971 년 중국에서 한나라 시대 때의 귀족 부인인 것 같은 여자 시신이 땅속 분묘로 발견된 사실을 말슴 드렸죠 마왕퇴묘라고

그 묘에 안장되었던 귀부인이 미라로 발견되었는데 살이 그대로 썩지 않고 물렁물렁한 상태고 얼굴 형상까지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한나라와 진나라는 시간 차이가 크지 않은 왕조입니다. 귀족 여인의 묘가 이 정도인데 진시황제의 묘는 어떻겠습니까.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았겠죠. 만약 진시황제가 미라로 발견된다면?.....

하지만 미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이미 서두에 말씀 드렸죠… 사구에서 죽고 여산에 묻히는데까지 두 달 가까이 걸렸고 구원에서 함양까지 운구할 때 이미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묻기도 전에 이미 부패되었던 거죠. 하지만 아직 여산릉을 발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100% 황제의 상태를 확신할 수는 없죠. 까 봐야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얼마 전 중국에서 ‘사마천이 기록한 내용이 사실일까’ 하는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산릉의 흙을 일부 취해서 수은 농도를 측정해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측정 결과 주변 다른 곳의 시료보다 여산릉의 흙에서 수은 농도가 20배나 넘게 측정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사마천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죠. 문화재 관련자라면 흥분되는 대목 아닙니까? 그렇다고 궁금하니까 중국인들이 여산릉을 까 볼까요? 아닙니다. 절대 개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대로 영원히 덮어두고 말까요? 특별한 답이 있습니다. 진시황릉 옆의 병마 도용 박물관을 방문하신 적 있으십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박물관에 직접 가봐야… 내 눈앞에 펼쳐진 2000년 전 고대 유물과 문화를 보고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앞으로는 진시황릉이 박물관화 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첨단 기술 시대입니다. 첨단 시대에 황릉을 개봉하지 않고도 초미니 로봇 촬영 또는 첨단 분석 장비 등을 사용해서 유물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최소의 개구를 통해 황릉 안의 구조와 형대를 조사하고 그 영상자료를 전 세계 황릉을 직접 알고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터넷 망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박물관 입장료 대신 유료로 접속을 통해 시청할 수 있도록 공개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황릉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후대 인류가 선대 조상들이 남겨 놓은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인문학적 고찰

 

오늘날 우리는 ‘진시황제는 폭군이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통일을 이루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갖으려고 더 큰 욕망을 품은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루려고 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그도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고 살아서는 죽도라도 지하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래서 지하 세계인 황릉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선대가 남긴 문화와 유물이 그저 부럽기만합니다. 단 적인 예로 이탈리아는 로마라는 선조 들이 남긴 유적으로 먹고 사는 것 같고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정치인 심지어는 그리스 신들이 지금까지 그리스 인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이제 중국도 진시황릉을 가졌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우리 한반도에도 선조가 남겨놓은 거대하고 찬란한 유산 하나쯤 발견되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ㅎㅎ

이도 저도 없다면 이제라도 후대에 물려줄 큰 유산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남겨줘야 하지 않을 까요?

지금까지 인문학 Tv 고경이었습니다.

 

오늘의 핵심 주제 리뷰

 

 

3.    차기 예고

 

자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고요. 다음 시간에는 진시황제 사망 이후 그를 이은 제2대 황제 호해와 환관 간신 조고 타락한 관리 승상 이사. 이들 3인간의 세 박자가 통일 진나라를 어떻게 망국의 길로 이끄는지 최초 통일 국가가 일부 몇 사람에 의해 망국의 길로 넘어가는 과정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