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사마천 사기 주본기(1)

팡씨1 2020. 2. 14. 18:51

사마천 사기 주본기(1)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마천 사기 은본기(殷本紀) 내용에서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과 나라를 잃게 된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은나라를 멸망 시키고 새로운 왕조 국가로 800년을 이어간 주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사마천이 기록한 역사서 주본기를 기준으로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나라에 대한 개괄적 내용)
먼저 주(周) 나라는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까지 상나라를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고대왕조 국가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나라이며, 790년간 유지했었습니다.

-. 주나라의 개괄적 설명
사마천은 주 왕조의 흥성은 창업자가 덕을 쌓은 결과라는 점, 그리고 그 시조가 되는 조상은 요임금 때 농업의 스승이었던 후직(后稷: 棄)이라는 사람이다는 내용과 함께 그 후손인 공유(公劉)나 고공단보(告公亶父) 등도 역시 농업을 중시했다는 설명과 함께 농업을 중시했던 주나라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 시점에서부터 고대인들은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는생활 방식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왕조는 무왕(武王)을 시작으로 마지막 난왕(赧王)까지 37대 왕이 이어지며 약 800년 역사를 유지합니다. 주나라는 개국 초기부터 가족 친족 또는 개국공신에게 영토를 나눠주고 봉지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는 봉건제도를 실시한 국가입니다. 물론 후대로 가면서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주나라는 문화적 경제적 측면에서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이어지는 시대이고 정착 농경문화가 본격화 되는 시기입니다.
 
-. 주나라 시대별 구분

(사마천이 기록한 주본기의 시간대별 구성 네 단계)

첫째 : 무왕 이전 개국 시기
시조인 후직 이후로 공유, 고공단보, 공계. 이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백성에게 선과 덕을 베풀면서 인의를 돈독하게 하는 시기입니다.

둘째 :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이후 서주를 중심으로 약 250년 역사를 품은 시기입니다. 이기간을 서주시대라고 명명합니다. 
덕정을 배풀어 포악했던 은나라를 물리쳤으나 성왕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신하가 임금(천자)을 능멸하거나 시해하는 등 부도덕한 사건이 빈번해지는 시기입니다. 서주 말기에 유왕과 그 유명한 여인 포사가 등장하는 시점이죠. 

셋째 : 평왕이 동쪽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BC771)이후 춘추시대입니다.
동주 시기의 시작임과 동시에 춘추시대로 들어가면서 주나라 왕실의 권한이 쇠미 해저 가는 단계입니다. 여러 제후국에서 패자들이 등장하며 덕에 의한 통치보다는 힘과 무력에 의한 통치 시대로 접어드는 단계입니다. 
춘추시대는 (BC771~BC403) 전국시대는 (BC403~BC221) 진나라 중국 통일 전까지 입니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나누는 경계는 춘추 시대 때에 열국의 강국 중에 진(晋)이라는 나라가  조·위·한 3국으로 분열한 시점의 해를 기준으로 합니다.
주나라가 천도를 낙양으로 하여 동주 시대가 시작되고 이후로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약해지면서 천자의 권위도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각각의 봉건 지역에서 힘센 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를 패자(覇者)라고도 부르게 됩니다. 이런 패자는 주나라의 천자를 대신해서 각 봉건국가 또는 제후국 별로 문제가 있을 때 그 해결을 위해 최고 책임자를 불러들여 대책 회의를 합니다. 이를 회맹(會盟)이라고 부르는데요 이처럼 부르는 위치에 있는 자를 패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회(會)는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하여 모이는 회합이며, 맹(盟)은 소의 왼쪽 귀를 잘라서 그 피로 조약서를 쓰고 회합한 제후들 간에 피를 나눠 마시는 의식)
대표적으로 춘추오패(春秋五覇)하면 제(齊) 환공, 진(晉) 문공, 초(楚) 장왕, 오(吳) 합려, 월(越) 구천이 있다. 한편 진 목공, 송 양공, 오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습니다.


넷째 : 원왕 이후 전국시대 (BC453년)
이 시기에는 주나라는 이름뿐 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진나라가 세력을 확장해 가는 시기입니다. 
춘추오패가 힘자랑을 하고 시간이 지나 진(晉) 나라가 한. 위. 조 3국으로 분열됩니다. 이후 주나라의 권위는 더욱 약화되고 각 지역의 강력한 제후들은 스스로 왕(王)을 칭하게 되고 이전까지 정치적 균형을 유지시켜오던 봉건제도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결국 붕괴되고 전국 시대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때는 신하가 제후나 군주를 살해하고 나라를 찬탈하거나 스스로 제후에서 왕이라 칭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덕과 용서는 사라지고 한번 전쟁에 지는 나라는 멸망에 이르는 약육강식의 세계로 변화되어가고 그중에 7개의 대국들이 강자로 부상되어 가게 됩니다. 이들을 우리는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진(秦) 조(趙) 위(魏) 한(韓) 제(齊) 연(燕) 초(楚) 라 부르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주나라는 시간이 가면서 천하의 대세가 덕의 정치에서 힘의 정치로 전환되어가는 즉 천명은 쇠락하고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대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이 나타난다.
 
[책 내용 속으로]

주나라의 시작 : 후직, 공유, 고공단보 이야기

(후직 : 后稷)
주(周)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후직은 오제본기에서 나왔던 제곡의 아들이며 동시에 요임금과는 형제입니다. 후직의 이름을 ‘기’라 하는데 이 ‘棄’ 자라는 한자는 버릴 기자입니다.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의 출생 신화를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후직의 어머니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그것에 매료되어 발자국을 밟았는데 기묘한 느낌이 들더니 태기가 있고 이후 태어난 아이가 후직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 출생이 불길하다 생각되어 그녀는 그 아이를 좁은 길에 내다 버렸는데 지나는 소나 말이 알어서 그 아이를 피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숲 속에 버리려 했는데 마침 산에 사람들이 득실대는 것입니다. 그래 할 수 없이 얼음이 얼어있는 도랑 위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날아다니는 새들이 깃털을 펼쳐 덮어주고 둥지를 품어 주듯 하니까 이 어머니는 이를 신기하게 여겨 아이를 다시 데려와 키우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그리고 이때 버리려 했던 것을 생각해 이름을 버릴기(棄) 자를 써서 ‘기’라 명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놀이를 해도 농사짓는 놀이 삼심기, 콩심기, 이러한 것들을 하고 놀더니 결국 농사짓는 일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요임금이 그를 등용하여 농사(農師:농림부 장관)로 삼습니다. 그리고 다음 임금인 순임금 때에는 더욱 농사에 대한 재능을 널리 가르치고 풍성하게 해서 결국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 부르고 성씨로 희씨(姬氏)를 내립니다.  

(공유 : 公劉)
이후 후손으로 후직의 아들 부줄(不茁)은 잠시 아버지의 농사(農師) 일을 맡았다가 관직에 뜻이 없었던지 맡은 일을 소홀히 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융적(戎狄) 지역으로 달아나 살았답니다. 융적(戎狄)은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을 뜻하니 지도로 보면 전국시대 관중(關中)이라 불리던 곳에서 북서쪽 변경인 것 같습니다. 북쪽 황토고원 어디쯤이 될까 싶습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후직의 증손자인 공유(公劉)라는 사람이 다시 증조부 후직의 사업을 닦아 농사에 힘쓰고 토지를 잘 관리 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더해서 강 건너의 목재를 채취하여 사용하기 시작하니 떠돌며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정착할 집이 생기고 정착해 사는 사람들에게 식량도 쌓이고 하니까 사람들은 공유를 의지하게 되고 주변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주나라는 이때부터 흥성하기 시작합니다..
공유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절(庚節)이 빈(豳, 섬서 순읍)으로 도읍을 정합니다. 빈(豳)은 지도에서 보시듯 관중 평원의 북쪽 황토고원에 인접한 지역입니다.

(고공단보 : 告公亶父)
후직으로부터 13대가 내려가면 고공단보(告公亶父)가 등장합니다. 나중에 태왕(太王)으로 추존되는 인물인데요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유의 사업을 다시 다스려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기가 좋아지자 북방의 훈육(薰育)과 융적(戎狄)이 빈의 도읍을 공격해와 재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땅과 백성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이때 고공단보의 남다른 덕행이 드러납니다. 보통 침략을 받으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통해서라도 침략자를 막고 물리쳐 자기 재산을 지키고 백성을 구해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대응 방법입니다. 하지만 여러 차례 고공단보는 훈육과 융적 침입자들에게 갖은것을 순수히 내어 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계속적으로 침략을 해오니까 이제는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나 침략자를 상대로 싸우자고 고공단보에게 건의를 했지만 고공단보는 격양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설득시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군주를 옹립한 목적은 군주가 된 제가 여러분들의 이익을 이루어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추대한 것으로 압니다. 현재 융적이 우리를 침범해 온 목적은 우리 땅과 백성들을 빼앗기 위함인데, 여러분들이 나를 따르던, 침략자인 융적을 따르던 여러분들에게 있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군주인 나의 결정으로 인하여 침략자와 싸움을 하게 된다면 이는 내가 여러분들의 아버지나 아들 또는 형제(兄弟)들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희생(犧牲)시켜 침략자들마저 제압하고 침략자들의 군주 노릇을 더 하게 되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이 나보고 적과 싸우자고 부추기는 것은 결국 백성의 희생을 통해 자기가 적군마저 누르고 그 위에 군림하는… 자기 권력만 높이게 되는 것이니 그런 식으로 백성을 이용해 높이 추앙받고 싶지 않다. 한마디로 나 잘되자고 백성을 교묘히 이용할 수 없다 이런 뜻이죠 그래서 고공단보는 싸움으로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피해서 빈(豳)을 떠나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기산(岐山) 아래 주원(周原)으로 옮겨 정착합니다. 주(周)나라의 명칭은 고공단보가 정착한 땅인 주원(周原)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기산은 관중(關中)평원의 서쪽에 위치합니다. 빈(豳)에 살던 백성들은 이제 모두 기산 아래 고공단보에게 몰려갑니다. 고공단보는 성과 집을 짓고 읍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하였고 오관(五官)이란 벼슬아치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오관은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토(司土), 사구(司寇)를 말하는데 사도는 교육을, 사마는 군사를, 사공은 토목을, 사토는 토지를, 사구는 법률을 담당하는 벼슬을 두어 이제 통치 체제를 갖추어 갑니다.  고공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태백(太伯), 우중(虞中), 계력(季歷)입니다. 막내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을 때에 성스러운 징조가 있어 고공단보는 손자 창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에 태백과 우중은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한 뒤에 왕이 될 의사 없음을 밝히고 형만(荊蠻)으로 피신합니다. 결국 막내아들 계력(季歷)이 뒤를 잇도록 했는데 이 사람이 공계(公季)입니다. 공계 계력이 죽자 아들 창(昌)이 자리에 오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주 문왕(文王)으로 추존되는 서백(西伯)입니다. 서백이란 서쪽의 우두머리란 뜻이고 창(昌)은 별칭입니다.
 
(서백창(문왕)) : 천하 사람이 서백에게 몰려든다
서백은 선조 후직과 공유의 사업을 따르고 고공과 공계의 법도를 본받아 행했는데 선비들과 제후들이 서백에게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이 시점에 관동에는 은나라가 존재했고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이 달기와 함께 주색에 빠져 폭정을 이어가고 있던 시기입니다. 이때 은나라의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이 하나둘씩 서백을 찾아 모여듭니다. 그중에는 굉요(閎夭)도 있고 사마천 사기 열전 첫 편에 등장하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도 이 무렵 고죽국을 떠나 서백창을 찾아 옵니다.
 
숭후(崇侯) 호(虎)가 서백을 시기해서 은(殷)나라 주왕(紂王)에게 거짓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서백이 선행을 베풀어 덕을 쌓고 있어 천하 제후들의 인심이 모두 서백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이는 장차 주왕께 해를 끼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주왕(紂王)이 즉시 서백을 잡아다가 유리(羑里)에 가둬버립니다. 그러자 서백의 충신 굉요(閎夭)가 걱정하여 미녀 및 훌륭한 말과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 은나라 주왕의 총신인 비중(費仲)이라는 사람을 매수해서 주왕(紂王)에게 가져다 바치도록 하자 주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여인 하나로도 족한데 이렇게 진기한 물품들을 많이 가져다 바치다니 당장 서백을 당장 석방하라.」
주왕은 즉시 서백을 사면하고 그에게 활과 화살 및 도끼를 하사하며 오히려 서백으로 하여금 서쪽의 제후들을 정벌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줍니다. 그러자 서백은 자기를 무고한 숭후 호(虎)부터 찾아 벌을 내립니다. 풀려난 서백은 낙읍(洛邑)의 서쪽 땅을 주왕에게 바치며 포락(炮烙)의 형벌을 중지해 달라고 청하자 주왕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유리에서 풀려나 주나라로 돌아온 서백이 제후들 간의 분쟁을 잘 판결하자, 주변 제후들이 자주 찾아와서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곤 합니다. 당시 우(虞)와 예(芮)나라 사이에 영토 다툼이 일어나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에 대한 판결을 서백에게 의뢰하려고 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영토 분쟁에 대한 판결을 서백에게 부탁하기 위해 주나라 땅에 막상 들어와 보니 주나라의 농부들은 모두 자기 밭의 경계를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나이 먹은 어른들을 공경하고 있었다. 이를 본 우와 예의 군주는 서백을 만나보기도 전에 영토문제로 다툰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국경 문제로 다투는 행위가 주나라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서백을 찾아가 봤자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일 뿐이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다투고 있던 땅을 서로 양보하였다고 합니다. 제후들이 이에 대한 일을 듣고서 「서백이 장차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천자가 되겠구나!」라고 예견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 해에 서백이 견융(犬戎), 밀수(密須 감숙성 서쪽), 기국(耆國 은나라 근처까지)등 주나라가 근거한 주변의 여러 제후국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가자 서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진 은나라 사람 조이(祖伊)가 그 일을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고했다. 하지만 주왕은
「천명은 나에게 있는데 서백이 무엇인들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무사안일로 일관합니다. 한마디로 주왕은 자만했던 것이죠.
서백은 그다음에 숭후 호(虎)를 토벌하고 그곳에 풍읍(豊邑)을 축조한 후에 기산(岐山) 밑에 있었던 주나라의 도성을 옮겼다. 다음 해에 서백이 죽고 태자 발(發)이 뒤를 이었다. 이가 주무왕(周武王)이다.
 
서백(西伯)은 모두 50년 간 재위에 있었다. 그가 유리에 갇혀서 지낼 때 주역(周易)의 8괘(卦)를 늘려 64괘로 만들었다. 이에 시인(詩人)들이 서백을 칭송했다. 주나라가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칭왕(稱王)을 한 것은 우(虞)와 예(芮)나라 사이에 있었던 송사(訟事)가 해결된 뒤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10년 후에 서백(西伯) 창(昌)이 죽었다. 시호를 문왕이라 하고 은(殷)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역법(曆法)을 제정하였다. 고공단보(古公亶父)를 태왕(太王)으로 공계(公季)를 왕계(王季)로 추존했다. 고공단보부터 추존한 이유는 대체적으로 주나라가 제왕이 될 상서로운 조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주나라의 선조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 왕조를 창시한 무왕 이전까지의 주나라 역사를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에서부터 서주 말엽 유왕과 미녀 포사 이야기를 해보고 주나라가 도읍을 서주에서 동주로 옮기게 된 이야기를 추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도 많이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