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은본기(殷本紀)
2020.1.27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마천 사기 하본기 우임금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마천 사기 본기는 처음 오제 본기 다음 하본기 그리고 은본기의
순서로 나갑니다.
중국 최초 역사적 근거를 갖는 나라는?
이번 시간부터는 은(상나라) 나라 (BC1600년~BC1046년 약 600년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은나라는 사마천 사기 역사책에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오제 본기 그리고 하본기와 함께 전설 속의 나라로만 여겨져 왔었는데 은나라 시대의 역사적 증거(유물)가 발견되면서 전설이 아닌 실존했던 왕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초로 역사적 근거를 갖게 되는 실체가 확인된 나라가 되겠습니다. 원래 은나라는 ‘상나라’라고 불려져야 타당합니다만 상나라가 은허라는 지역을 상나라의 도읍으로 삼은 이후 은나라라고도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상나라, 은나라는 같은 왕조를 의미하게 된 거죠. 오늘 이 시간에는 은나라 유적 발견과 그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은본기 내용은 다음회에 은 왕조인 탕 임금부터 은을 멸망에 이르게 한 주왕까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은나라의 역사적 근거가 된 유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갑골문자 이야기를 들어 보셨죠? 바로 이 문자를 사용한 왕조가 은나라 때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 년 전인 1899년 청나라 말기 국자감 제주(祭酒) (지금 대학 총장의 지위에 해당)라는 신분을 갖는 왕의영(王懿荣)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고대 금석문을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하던 고고학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의영이 말라리아(학질)에 걸려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료를 위해 그 병에 특효가 있다고 잘 알려진 한약재, 용골(척추동물의 골격)을 구입하게 됩니다. 그때 한약재로 구하게 된 뼈를 곰곰이 살펴보던 왕의영이 용골(갑골)에 뭔가 희미하게 무늬가 그려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발견한 그 무늬가 바로,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고대 문자인 갑골문자 (甲骨文字)이었던 것이지요. 이 뼈를 연구한 결과 이것은 용골龙骨도 아니고 수천 년 된 거북 껍데기와 야생동물의 뼈로서 거북 껍데기 뼈 위에 새겨진 도안의 형태를 한 문자를 식별하는데. ‘日’, ‘月’, ‘山’, ‘水’ 등의 글자, 나중에는 상나라대(商代)의 몇 명의 왕의 이름도 있는 것을 알아내고서 갑골문 위에 새겨진 것이 고대 글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용골의 발견 과정
그러면 어떻게 하여 이 갑골문이 새겨진 용골을 발견되게 되었고 용골이 약방에서 약재로 팔리게 되었는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처음에 용골이 발견되게 된 계기는 허난 성 안양시安阳市 서북에 위치한 소둔촌 小屯村에 사는 이성이라는 한 농민이 밭을 가는데 이상하게 밭에서 오래된 것 같은 고대 거북이 뼈가(갑골) 계속해서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성은 여러 번 밭을 경작하면서 동으로 만든 동기, 옛날 돈, 옛날 거울 등을 발굴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성이 갑골(용골)을 중국에서 약재로 약방에 맨 처음에 팔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은 원래 이발사였다고 합니다. 이성이 약방에 갑골을 팔기 시작하게 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성이 처음 몸에 농창脓疮(피부 괴양에 따른 고름)이 있어 몹시 앓았는데 그가 가난해서 의원에 가서 약을 살 돈은 없고 그래서 밭에서 주은 갑골을 갈아서 농창 위에 발라보았습니다. 갑골은 밭에서 파낸 거북 껍데기인 귀갑龜甲과 소뼈인 우골牛骨이었는데 이를 환부 위에다 붙이자 흘러나오는 고름을 뼈가루가 빨아 당기고 상처가 아물고, 갈은 뼈를 칼로 다친 상처에도 바르면 아물었습니다. 이러한 효능을 이성이라는 사람이 알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 이명래 고약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제가 어렸을 때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생긴 고름을 빼낼 때 이 고약을 붙이고 있으면 속까지 스며 있던 고름이 시원하게 빠져나오고 상처는 바로 아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고약의 주성분이 아마 뼈가루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성은 이에 착안하여 용골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약 이름을 용골이라 붙이고 이를 약방에 내다 팔 기 시작했습니다. 용골은 또 학질 즉 말라리아의 묘약으로도 베이징 약방에서 팔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실이 소문이 나자 가난한 농민들이 야생동물의 뼈나 갑골을 팔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사방에서 뼈를 찾아내고 그것은 다시 대부분의 약점포에서 용골이나 거북판 약재로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 갑골은 약 상점에 가서 팔고 적은 갑골들은 말라붙은 우물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이 용골은 처음에 1근에 몇 전만 주면 살 정도로 가격이 저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의영이 이를 구입하여 갑골문이 글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뤄전위羅振玉, 왕궈웨이王國維 등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이를 이어받아 고증 연구를 한 끝에 용골龍骨의 용도가 점을 치고 그 결과를 기록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상商 왕조의 점술가가 왕가를 위하여 점을 친 점괘를 기록할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점을 쳐 갈라 터진 무늬의 장단과 거칠고 세밀한지, 굽었는지 곧은지 등을 통해 길흉과 성패를 판단하고 점을 친 내용과 결과를 칼을 사용해 새긴 것입니다.
그 내용을 해석한 것 중 예를 들면 은나라 왕이 전쟁을 언제 하면 좋은지, 왕비의 출산 일이 언제이고 아들인지 딸인지 등등 점을 보고 그것을 예측하고 결과를 뼈에 새겨 기록하고 하는 그러한 점술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임을 알게 된 거죠.
은나라 왕은 정치와 종교를 함께 맡아서(제정일치) 다스렸는데요.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점을 쳐서 결정을 하고, 점을 친 결과는 거북의 배딱지나 짐승의 엉덩뼈에 적어 놓았다고 해요. 그것이 바로 갑골문자라고 합니다.
이처럼 약재로 쓰이던 용골이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 영국, 일본 등 국내외에서 많이 찾게 되면서 용골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해서 심할 경우 100배이상이나 비싸게 팔려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문자가 만들어지는 형식을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갑골문자는 대부분 상형문자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갑골문(甲骨文)은 중국에서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문자 형식이다. 이는 상형象形、지사指事, 회의会意, 형성形声、전주转注, 가차假借 등 글자를 만드는 방법(육서(六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PS) 육서의 구분
상형 : 그려서 형체를 따라 굽게 되며, '日'과 '月'
지사 : 살펴서 그 뜻이 나타나는 것으로, '上'과 '下'
회의 : 글자를 나란히 하고 뜻을 합쳐서, 사물이 가리키는 바
휴 |
休 |
人+木 |
나무와 나무에 기댄 사람 |
형성 : 사물로써 뜻(名)을 삼고, 소리(譬)를 취해 서로 이루는 것 (의미+소리)
큰 바다 |
양 |
洋 |
水(물) |
羊(양) |
전주 : 같은 류의 글자를 한 수(首)에 세워, 같은 뜻을 서로 주고받는 것
考'(고)과 '老'(늙을 로)가 그러하다.
가차 : 본래 그 글자가 없어,소리에 의거해 글자를 기탁하는 것으로, ‘令’과 ‘長’
말로는 존재하나 문자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나 글자를 문자로 나타내기 위해, 표현하고자 하는 단어의 발음과 같거나 비슷한 다른, 기존의 한자로써 표현하는 것
갑골에 새겨진 문자가 은나라 (상) 유물임을 알게된 일
그런데 당시 왕위영이 약방에서 구매한 갑골에서는 문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당시 마을 사람들이 갑골의 문자를 칼로 긁어낸 다음 약방에 내다 팔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행위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귀중한 문화재 보물을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죠. 소둔촌에서 출토된 갑골문은 모두 상대商代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서 소둔촌은 작은 둔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고대 상나라 왕조 후기 때 도읍이 있던 곳입니다.
기원전 16세기 전후(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 상商의 탕 임금이 하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중원에 상나라를 세운다. 주로 황하강 중하류 지역이죠. 상商나라 반경盘庚왕 때 도읍을 은으로 천도해서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 때 나라가 망할 때까지 273년간 은이라는 지역이 계속 상왕조의 통치 중심이 되어 왔던 곳입니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상나라를 취한 이후에 은 지역 백성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은의 도읍지는 다만 역사기록에서만 찾을 수 있었는데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물증 자료가 풍부하게 제공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왕위영과 함께 갑골문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가 있는데 유악이라는 사람입니다. 유악은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용골을 수집하는데 글자가 없는 것은 사지 않자 그 후에는 일부러 글자를 새겨 넣어 팔러 오는 경우도 있어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합니다. 한마디로 짜가가 돌기 시작한 거죠. 유악이 갑골문을 수집하는 기간인 1900년에 중국에 의화단 사건이 일어납니다. 의화단 사건이라 하면 일종의 외세 배척 운동입니다. 서양 여러 국가가 중국을 뱃겨 먹으려고 하니까 일어난 외세 거부운동이죠 이 사건 때문에 결국 청나라는 외국 군대가 중국에 주둔하도록 허가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마침내 수도 베이징까지 유린당하는 계기가 됩니다.
유악은 갑골문이 사람들 특히 고고학자들의 주의를 이끌었고 갑골 문자는 상나라 시기의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900년에 8국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하자 자희태후와 광서제가 시안으로 도피하고 당시 왕의영은 황제의 명을 받고 북경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
7월 20일 연합 침략군이 동편 문으로 공격하여 들어오자 왕의영은 훈련병을 거느리고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북경은 점령되고 맙니다. 그러자 그는 절명시(죽기 직전 쓰는 한시)를 남기고 집에 있는 우물에 몸을 던져서 자살해 버리고 말지요.
이에 왕의영의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처분하자 유악은 갑골문 1천 개를 사들여 연구를 계속하여 용골이 발굴된 곳이 중국의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 촌小屯村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신강에 유배되었다가 죽습니다. (왕의영의 집 고향 산동 연대시烟台市 복산구福山区에는 왕의영의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왕의영이 갑골문 해석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가 하던 갑골문에 대한 연구사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졌는데 그중 한 명이 나진옥이라는 사람입니다. 1908년 용골 수집가인 나진옥(羅振玉)은 사람들을 시켜 용골의 출처를 조사하게 되었고, 드디어 원하(洹河)의 소둔小屯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진옥은 죽은 유악의 갑골문을 사들이고, 이를 추가로 수집하여 연구를 계속하였으나 그 역시 신해혁명(1911청나라 멸망)이 일어나면서 일본으로 망명을 하고 마는데 그는 안양현 소둔촌을 은나라의 유적, 은허라고 생각을 합니다.
은나라는 농사가 잘 되는 황토 지대에 자리를 잡았는데요. 은(허)라고 하는 유적지가 황하 강 유역에 있지요. 황하 강 주변에는 황하를 따라 운반되어 온 양분의 흙이 쌓여서 만들어진 기름진 땅이 넓게 펼쳐져 있고, 큰 강이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해요.
1915년 뤄전위가 소둔촌을 방문하여, 갑골 외에도 청동기·옥기 등을 입수하고. 1928년 중화민국 중앙연구원의 역사어연구소가 둥쭤빈董作賓·리지李濟를 중심으로 샤오둔촌의 은허 발굴을 실시하여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타난 은의 상나라(BC 1600∼BC 1046년) 말기(BC 1300년부터)의 도성 은허殷墟를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1920년대에서 50년대에 걸쳐 갑골이 많이 발견 되었던 안양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그 곳에서 놀랍게도 수많은 갑골과 질 좋은 청동기, 아름다운 토기, 집터와 무덤, 궁궐의 모습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전설 속의 나라인 은나라의 실체가 밝혀졌다고 해요. 이 갑골문자가 한자의 기원이 되었다고 해요.
특히 완전한 갑골문자를 확인하게 됩니다.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으로 현재 세계 인구 중의 4분의 1이 사용한다.
특히 은허에서 확인된 15만 편 중에서 확인이 된 갑골문은 4500자에 이르고 있으나 해독된 글자는 2,500 여자에 불과한 실정이다.
1936년에 12기의 왕릉과 2500 여기의 제사 갱, 부장 묘가 발굴되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은(상) 말기인 BC 1300년에서 BC 1046년 사이에 재위했던 12명의 왕, 즉 역사서에 나온 반경에서 주왕까지 12명의 왕으로 해석하였다.
은허 발굴 문화재는 200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은(상) 나라는 동이족의 일파라는 것입니다. 고고학자인 푸쓰녠(부사년)은 “은(상) 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하였고, 망한 뒤에 동북으로 되돌아갔다” 하였다. 2008년 발굴된 원북상성도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으로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한다.
한자의 변천과정
갑골문 : 은나라 상형문자 거북이 배 뼈등에 새김
금문 : 주나라(춘추전국시대) 청동기 정에 새김
전서(소전) : 통일진나라 진시황이 통일후 문자 통일을 위해 명명한 문자체 (도장,인장,비석문)
서체(예서) : 한나라 때 쓰기 시작
서체(해서) : 후한시대 규격화된 문자 (정자) 진서라고도 불려진다.
서체의 종류 :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지금까지 인문학 TV 고경 이었습니다.
차기 예고
다음 편은 본격적으로 은본기 탕임금의 건국에서 주왕의 멸망까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다음편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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