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인문학 Tv 고경 입니다.
여러분께 두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권력은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피해야 할 것일까요.
복수심은 인간에게 긍정의 힘을 줄까요 아니면 부정의 힘을 줄까요.
오늘은 이 두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사마천 사기 역사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 세가 30편의 시작은 오태백 세가로 시작합니다. 태백은 중국 주나라 춘추시대에 오나라를 세운 시조입니다. 공자는 태백이 세 번에 걸쳐 천하를 차지하지 않고 왕권을 양보했을 정도로 덕을 지녔고, 백성들은 그런 태백을 높이 칭송했다고 말합니다. 왕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일러, 양위讓位라 하는데 사마천은 이 것을 매우 이상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두 인물, 오태백과 그의 후손 계찰은 왕위를 사양한 것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입니다. 반면 같은 오나라의 후손으로 합려라 불려지는 공자 광은 자기 사촌인 요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찬탈 한 인물입니다. 즉 권력을 양위한 자 찬탈한 자 둘을 대비하여 사마천은 오나라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사성어 와신상담을 낳게 한 이야기 ,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 사이에 벌어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란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되는 <오태백세가>에는 이처럼 왕권을 양위한 자와 왕권을 찬탈한 자의 이야기와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기 역사서 속으로)
오나라 왕 계보를 보며 왕권의 양위와 찬탈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중국 주나라 문왕의 할아버지인 태왕(고공단보)은 맏아들 태백이었고 둘째는 중옹 그리고 셋째 계력이 있었습니다. 형인 태백과 중옹은 막내 동생계력이 덕이 있음을 알고 왕위를 양보하고 이족이 사는 형만으로 도망쳐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삽니다. 지금의 양자강 하구 상하이 지역이 형만입니다. 막내 계력의 아들은 바로 서백 창으로, 훗날 주문왕周文王이 됩니다. 이런 덕 있는 인물(특히 셋째 막내)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것을 큰 미덕이라 생각한 것이죠. 사람들은 그간 권력을 쥐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 경험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미덕으로 여기게 된 것이죠.
태백은 형만으로 달아나 그곳을 구오(句吳)라 명명하고 그 지역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오태백이라 하며 임금이 됩니다. 즉 오나라의 시조가 된 겁니다. 태백이 아들이 없자 그의 동생 중옹이 대를 잊고 그 후손이 자리를 물려받다가 4대째 주장이 왕에 올랐을 때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찾아와 오나라에 그대로 봉하고, 주장의 동생 우중은 옛 하나라 도읍에 제후로 봉합니다. 결국 오나라는 주나라와 같은 희씨 성을 갖는 혈통이었던 것이죠.
[춘추 시대 지도] 하지만 우중의 우나라는 훗날 진(나아갈 진 晉) 나라 헌공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반면 오태백이 세운 이만 지역 형만의 오나라는 계속 유지되고 19대 후손 수몽에 이르러서는 더욱 흥하게 됩니다. 이때 수몽은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며 중원 지역과 소통하기 시작하고 이웃 초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도 시작합니다.
[오나라 왕 계보]
오태백의 아름다운 양위 이야기는 수몽의 아들 계찰에게서 또 한 번 반복됩니다. 수몽에게는 제번, 여제, 여매, 계찰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막내인 계찰이 덕이 있고 가장 훌륭했는데 이 사실을 그의 아버지 수몽 왕은 물론 그 형제들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수몽은 후계 왕위를 막내 계찰에게 물려주려고 하지만 계찰은 극구 왕위를 사양합니다. 결국 수몽이 죽자 그의 큰아들 제번은 막내 계찰에게 왕권을 잇게 합니다. 하지만 계찰은 극구 사양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하는 수 없이 큰아들 제번이 왕위를 계승하고 그 가 죽자 다시 둘째 동생 여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아버지 수몽의 뜻에 따라 형제들 간에 왕위를 물려 이어가기로 합니다. 이때 막내 계찰은 연릉에 봉합니다. 그래서 계찰을 연릉계자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계찰은 어떤 사람인가)
왕이 된 여제는 계찰로 하여금 노나라를 시작으로 중원의 여러 제후국을 사절로 방문케 하여 외교력을 피도록 합니다. 계찰은 음악과 춤에 조예가 깊어 노나라에 들렀을 때 음악을 듣고 춤을 보고는 천자 주나라 내 각각의 제후국 또는 왕국의 흥망을 예측하고 평가하는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때 계찰이 방문한 나라는 노나라, 제나라(안영), 정나라(자산), 위나라(호위할 위 衛), 진(晉) 나라 (세 가문: 조. 한. 위(魏)), 서(徐) 나라 등 중원의 여러 나라고 계찰은 깊은 문화적 소양을 드러냅니다. 계찰은 덕망과 문화적 소양을 품고 중원을 돌며 오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왕이라는 최고의 자리는 양보했으되 오나라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여기서 계찰의 성품을 유추할 수 있는 사자성어 계찰계검(季札繫劍) 또는 季札掛劍(계찰괘검)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계찰이 처음 사신으로 길을 떠났을 때, 오(吳) 나라의 북쪽으로 가는 도중에 서(徐) 나라에 들러 서왕(徐王)을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왕은 평소 계찰이 갖고 있는 보검을 갖고 싶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계찰 역시 속으로는 서왕이 자신의 보검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사신으로 중원(中原) 각 나라를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계찰이 각 나라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徐) 나라에 도착했는데 서왕은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찰은 자기 보검을 풀어서 서왕이 묻힌 무덤 옆의 나무에 걸어놓고 떠납니다.
이 것을 보고 따르던 시종이 계찰에게 묻습니다. "아니 서왕은 이미 죽었는데 그 검을 또 누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계찰이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처음에, 마음속으로 서왕에게 주기로 결정했는데, 서왕이 죽었다고 해서 내가 어찌 나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합니다. '계찰계검'은 이 글을 요약한 말입니다. 같은 말을 중국 당나라 사람 이한이 쓴 《몽구(蒙求)》에서는 '계찰괘검(季札掛劍)'으로 적고 있습니다.
사마천(司馬遷)은 계찰의 이런 인물됨을 평가해, 연릉계자(延陵季子)의 어질고 덕성스러운 마음과 도의(道義)에 감탄하며 높이 추앙하는 말을 합니다.
"연릉계자의 세심한 자취만 봐도 그는 깨끗함과 혼탁함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계찰을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한 군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라며 높이 평가합니다.
(이제부터는 왕위 찬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오나라 왕 여제가 오나라 왕으로 있을 당시 초나라와 오나라는 자주 변경에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오나라 여제가 죽고 그다음 동생 여매가 왕에 오릅니다. 이때 초나라에서는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를 죽인 평왕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여매가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죽자 오나라 백성들은 또다시 막내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계찰은 극구 사양하고 달아나 버립니다. 할 수 없이 왕위는 여매의 아들인 요가받게 되고 요가 왕에 오릅니다. 계찰의 조카가 왕위에 오른 거죠. 이때부터 오나라의 왕위 쟁탈전이 시작됩니다. 여러 번 왕위를 거부한 삼촌 계찰도 그다음 대 조카들 간의 왕위 다툼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계찰처럼 자신이 권력 다툼의 한 복판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고 해서 권력 다툼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닌 거죠. 왕위에 새롭게 오른 요 왕을 살해한 공자 광의 이야기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양위의 미덕을 보여준 오태백과 계찰의 모습과는 정 반대로 왕위 찬탈에 성공한 공자 광의 이야기 합려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합려의 왕위 찬탈과 오자서) (오자서 열전, 자객 열전 전제 이야기)
[오나라 계보](계보 설명)
공자 광은 제번의 아들이었는데 자신을 대신해서 사촌 요가 왕위에 오른 데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본래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제번, 여제, 여매 순으로 왕위가 전해졌는데 계찰이 왕위를 거부하자 여매의 아들 요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자 광은 막내 삼촌 계찰이 왕위를 사양하면 당연히 큰집 장손인 자신이 마땅히 왕위를 차지할 줄 알았는데 공염불이 돼버린 것이죠. 그래서 공자 광은 이후로 항상 왕의 자리를 엿보기 시작합니다. 쿠데타 시도를 염두하고 있는 거죠.
요왕 9년 초나라와 오나라 변경에서 뽕잎을 따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자 초나라가 먼저 오나라를 공격해 변경 지역을 망쳐 놓습니다. 이때 오자서가 나섭니다. (오자서 열전) 오자서는 초나라 평왕을 피해 오나라로 망명해온 초나라 사람입니다. 오자서는 자기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 평왕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요왕에게 초나라를 공격할 것을 설득하려 합니다. 하지만 오자서가 개인적 복수심에 말한다는 것을 눈치챈 공자 광은 초나라 공격을 반대하고 나섭니다. 이때 오자서 역시 오나라 공자 광이 왕위에 욕심을 내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제라는 사람을 광에게 소개해 줍니다. 전제는 나중에 요왕을 암살하게 되는 자객입니다. 결국 공자 광은 오자서가 소개한 전제의 힘을 빌어 자기 사촌 요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잠깐 자객 열전에 나온 전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자객열전 전제)
공자 광은 오나라가 초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요왕의 형제 갑용과 촉용이 전쟁터로 나갔다 초나라에 포위되어 퇴각하지 못하고 고립된 시점을 기회로 삼아 요왕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술자리를 갖습니다. 요왕은 만의 사태를 대비해서 왕궁에서 광의 집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술자리에 이르기까지 호위병을 늘여 세웠고,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자는 모두 몸을 수색하게 합니다. 공자 광은 연회중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연회 자리를 피하고, 그 사이 전제는 요리사로 위장해서 생선 구이 안에 비검을 숨기고 요왕에게 나아갑니다. 전제는 생선구이 속 짧은 비수로 요왕의 가슴을 찔러 암살하고 그와 동시에 호위병의 긴 칼이 전제는 죽음을 당합니다. 이렇게 해서 광은 전제의 도움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고 왕위에 오른 다음 합려라 칭합니다.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상경에 올려 보답합니다. 왕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오나라로 돌아온 막내 삼촌 계찰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조상님 제사만 끊기지 않는다면 어차피 우리 군주이니 원망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난을 일으킬 수는 없고, 세워진 자를 따라야 하니 이것이 선인의 법도이다.’(非我生亂 立者從之 先人之道也), 결국 막내 삼촌 계찰도 조카 광의 반란, 쿠데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춘추 패자가 되고자 하는 오나라 합려의 꿈)
쿠데타 성공으로 왕이 된 합려에게는 여러 인재가 많았습니다. 전제를 소개한 오자서를 비롯하여, 백비, 손무까지. 합려는 이들의 힘을 빌어 초나라를 쳐 물리쳤고, 오나라의 군대는 초나라 수도 '영'에까지 이르렀으며, 오자서는 초나라 평왕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어 채찍질하여 복수를 합니다. '굴묘편시 掘墓鞭屍'
이후에도 오나라는 중원의 제후국들과 전쟁을 통해 힘을 키워 갑니다. 하지만 오나라가 초를 치러 간 사이 월나라가 오나라의 뒤통수를 치고, 초나라는 진나라에 구원 요청하여 다시 오나라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오나라의 세력이 다시 어려워집니다. 이때를 틈타 합려 동생 부개가 형하는 짓을 보고 배웠는지 형 합려를 배신하여 스스로 오나라의 왕에 오릅니다. 합려는 이소 식을 듣고 오나라로 즉시 돌아와 동생 부개를 쳐서 내쫓아 버립니다. 결국 부개는 초나라로 도망갑니다.
(합려의 죽음과 부차의 등장)
이때만 해도 합려는 크게 명성을 떨쳤지만 월왕 구천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때 월나라 군사는 세줄로 늘어서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스스로 목을 찔러 오나라 군대의 사기를 꺾었고 결국 오나라는 전투에서 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상을 입은 합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에게 꼭 복수하라고 명하고 죽습니다. 합려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월나라 구천을 꺾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이를 갈고 속을 썩인다)하며 3년 동안 매일 장작 위에 잠을 자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와신상담의 와신입니다. 결국 부차는 월왕 구천을 회계산에서 꺾고 오나라의 신하로 만들어 복수를 이루게 됩니다.
(오자서와 부차의 갈등)
구천이 회계산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 구천은 신하 문종의 제안을 받아들여 후궁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고 오나라 태제 백비에게는 뇌물을 써서 오나라 부차에게 항복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건집니다. 하지만 구천이 그리 한 것은 그 역시 남몰래 복수할 날을 기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초마라 평왕에게 복수한 경험이 있던 오자서는 뒷 탈이 없도록 구천을 깨끗이 처치할 것을 여러 차례 부차에게 간언 합니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물리치고 뇌물 받은 간신 백비의 의견을 들어 구천을 살려줍니다. 이제 부차의 마음속에는 월왕 구천은 신경 쓸 대상도 안 되는 거죠. 부차에게는 이제 중원으로 향해 나가 제나라 진나라까지도 견제하며 공격하면 빼앗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타오르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자서를 시기했던 정적 백비가 모함해서 오자서를 비난하자 오자서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오자서가 전쟁을 피해 자기 자식을 제나라에 빼돌렸다는 백비의 말을 부차가 전해 듣고 오히려 오자서에게 칼을 보내어 자결을 명합니다. 부차를 설득시키기에 한계에 다다른 오자서는 작심한 듯, 자기가 죽으면 가래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자라면 그 나무로 자기 관을 짜고 자기의 눈을 뽑아 오나라 동문에 걸어 두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오자서와 합려는 군신 간에 서로 화합하고 신뢰하는 관계였지만 그 아들 부차와는 반목하는 관계로 변질된 겁니다.
(사자 성어 와신상담 이야기)
이 시점에 사자성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은 [臥:누울 와 , 薪:섶나무 신 , 嘗:맛볼 상 , 膽:쓸개 담]이며 "장작 위에 누워서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의 한자성어입니다.
오왕 부차는 아버지 합려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3년 동안 매일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월왕 구천을 향해 이를 갈았고, 반면 회계산에서 패하고 부차의 신하가 되어 부차의 똥까지 먹고 애첩 서시까지 넘겨주며 치욕을 당한 월왕 구천은 매일 쓸개를 핥으며 부차를 향해 복수를 꿈꾸며 상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각각 복수를 위해 오왕 부차는 와신 했고, 월왕 구천은 상담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온 고사성어가 와신상담입니다.
(월나라 구천의 승리)
시간이 지나며 오왕 부차는 중원에 진출하여 여러 나라들과 세력을 다투는 위치까지 오릅니다. 하지만 이 시점 공자의 제자로 유명한 자공이 진나라, 제나라, 오나라, 월나라를 각각 돌며 유세하며 오나라가 중원에 집중하여 세력을 넓혀가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자공은 월나라 구천을 찾아가 중원에 집중하는 오나라의 뒤통수를 치라고 알려줍니다. 월나라 구천은 자공의 제안을 따라 중원 진출에만 몰두해 있는 부차가 오나라를 비워두고 진(晉) 나라와 맹주를 놓고 다투며 나라를 비운 틈을 노려 오나라를 공격해 태자 우를 생포합니다. 이때서야 여러 나라의 견제를 받게 된 부차는 약한 모습을 보이며 월나라에 화해하자고 요청 하지만 이미 강성해진 구천은 오히려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 땅을 차지하고 오왕 부차를 꺾습니다. 나라를 잃은 부차에게 월나라 구천은 그를 민가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만 부차는 자괴감이 들었는지 스스로 ‘오자서의 말을 따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말하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합니다. 이때 구천은 주군을 망하게 만든 간신 백비도 주살해버립니다. 이렇게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BC 473) 춘추시대의 무대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사마천 사기 오태백 세가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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