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지침/책 이야기

공자세가 2부

팡씨1 2020. 9. 4. 13:10

 공자세가(孔子世家): 2부


공자 40대와 50대 중년의 공자 역할(현재 사회로 치자면 사오정(45세 정년),오륙도(56세 까지 일하면 도둑)
정치계에서 팽당했던 공자


(주요 목차 내용)
40대 노나라 여러 대부들의 하극상을 보고
차라리 벼슬을 포기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을 다하다. (양호의 인선 제의 거절)
정치에 미련을(공산불뉴의 벼슬 제의 거절)
결국 중도읍 재상에서  노정공을 협곡회맹에서 구하다.
사공으로 승진 (삼환씨 삼도성 타도)
대사구로 소정묘 사형
정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노나라를 떠나는 공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사마천이 전하는 공자의 일생 지난 1편에 이은 2편입니다.
지난 공자세가 1편에서는 사생아로 출생한 공자의 불운한 어린 시절과 이후 공자 나이 30대 장년기까지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요즘 시대의 세태를 반영한 나이대별 은어가 있죠? 40대에는 사오정, 50대에는 오륙도가 있습니다. 사오정은 45세에 정년을, 오륙도는 56세까지 버티면 도둑놈 심보다 라는 이중적 표현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날 백세 시대에는 이 4.50대 나이가 오히려 인생의 황금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40대 50대에 공자는 어떤 삶을 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이 영상을 보고계신 여러분이 4.50대 나이에 해당 되신다면 공자의 삶과 여러분의 삶을 대비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과 공자의 삶에서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공자도 오륙도, 56세 되던 때 모든 벼슬을 내려 놓고 천하를 주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공자가 주유천하를 떠나기 전, 4,50대 때 공자 일생 이야기 입니다.



공자의 나이 42세 때인 기원전 510년에 노나라 귀족 삼환씨를 피해서 노나라를 떠난 소공(魯昭公)이 제와 당진나라를 오가다가 결국 건후(乾侯) 지역에서 죽자 노나라는 그 동생 정공(定公)을 새로 후에 세웁니다.
그 뒤 5년이 지난 (기원전 505년), 노나라 실세였던 대부 계평자(季平子)역시 죽고 그의 아들 계환자(季桓子: 이름은 사(斯))가 그 뒤를 잇게됩니다.

-. 공자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는 계손씨와 오나라 신하: 제나라에서 경공과 안영에게 쿠사리 듣고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가 그 이후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천이 일부로 공자가 높은 지적 소유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땅속 귀신이야기와 거인국 소인국 이야기 입니다.

(땅 속에서 발굴한 항아리 안의 : 양의 귀신 이야기)

계환자가 우물을 파다가 땅속에서 안에 양처럼 생긴 물건이 들어 있는 항아리를 얻었습니다. 계환자는 일부러 공자에게 찾아가 양같은 모양을 알면서 개처럼 생긴 물건을 얻었다고 하면서 혹시 뭐 같아 보이냐고 묻습니다. 공자가 지체 없이 질문에 답을 합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것은 양인 듯싶습니다. 산에는 나무 기(夔)와 바위 망랑(罔閬) 귀신이 있고 물에는 물귀신 (망상(罔象))이 있듯이 땅속에는 분양(墳羊)이라는 양귀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환자가 공자의 지식을 떠 보려고 물어 본 것 입니다. 이 처럼 공자는 당시 산천의 귀신에 대한 내용도 박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한가지 공자의 해박한 지식을 말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고대 우임금이 통치하던 곳의 소인국 거인국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공자가 살던 시절에 오나라가 월나라를 정벌했는데 오나라는 회계산에서 수레 한 대에 가득 차는 커다란 해골 한 개를 얻게됩니다. 해골 크기에 놀란 오나라 군주가 사자를 공자에게 보내 물어보게 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해골이건대 이렇게 큽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옛날 우임금이 여러 신들을 회계산에 모이도록 불렀는데 지역 부족장 방풍씨(防風氏)가 시간을 어기고 늦게 도착하자, 우임금이 그를 죽여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는데 , 방풍씨의 두개골이 너무 커서 수레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것은 방풍씨의 해골인 듯 싶습니다.」
오나라 사신이 다시 물었다.
「그 우임금이 불렀다는 신들은 어떤 신들이었습니까?」
「비구름을 일으켜 천하에 복을 내리는 신, 제사를 지내는 일을 감시하는 신들이며, 토신과 곡등 여러신이 있습니다.」
오나라의 손님이 계속 물었다.
「그럼 방풍씨는 무엇을 지키던 신이었습니까?」
「왕망씨(汪罔氏중국 고대국가)의 군장들로 봉산(封山)과 우산(禺山)을 지키며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성은 리씨(釐氏)였습니다. 우(虞), 하(夏), 상(商) 나라 때는 왕망(汪罔)이라 했고 주나라 때는 장적(長翟)이라 했으며 지금은 대인족(大人族: 거인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키는 어떠했습니까?」
「초요씨(僬僥氏:서남쪽 만이족, 소인국)는 키가 삼척으로 가장 작고, 큰 종족으로는 그들의 열 배가 넘지 않은데 왕만씨 족 사람들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초나라 사신이 공자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며 선생은 참으로 성인이십니다.」
….이 두 이야기는 (양의 모습 토신과, 거인과 소인에 대한 이야기) 사마천이 공자의 해박한고 박식한 지식을 밝혀두려고 삽입한 내용 같습니다.

-. 양호의 하극상이 보기 싫어 은퇴를 선언하는 공자 : 스스로 사오정(45세 정년)을 선택하다.

(양호와 공자의 관계에 대해서 보충이야기)

계평자의 가신이었던 양호는 계씨 집안의 대권까지 주물럭 거리며 계손씨의 대권을 이은 계환자를 구금까지 합니다. 그리고 공자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싶어서 공자를 만날려고 애를 씁니다. 양호가 누구입니까? 공자가 청소년때 어머니를 잃고 홀로 되어 계손씨 집안을 찾아 왔을 때 공자를 문전박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40대가 된공자는 출세 지향주의자 양호의 권력욕심을 간파하고 계속 양호 만나기를 회피합니다. 그러자 양호는 선물로 삶은 어린 돼지 고기를 공자에게 보냅니다. 예를 중시하는 공자가 반드시 답례로 인사하러 올 것 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공자는 답례차 양호에게 안 갈 수 없어 고민하다가 양호가 집을 비운 사이 얼른 들르고, ‘양호가 집에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 라고 할려고 서둘러 양호 집을 찾아 가는데 중간 길 거리서 양호를 직접 만나게 됩니다. 양호는 이때다 싶어 공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나라가 어렵건 말건 내버려두는 것이 어진 사람입니까?” 순간 양호을 꼴 보기 싫어하는 공자가 댓구를 하지 안습니다. 그러자 양호가 다시 묻습니다. “어진 사람이 되지 못할 까 두려운 것이오 아니면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오!” 양호의 이 말은 공자보고 ‘공자 당신 바보아냐?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잡아야지!’라는 의미입니다. 양호인 자기가 공자를 찾을 때 나를 도와 기회를 잡아라 이말 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양호의 도와 달라는 권유에 짧게 대답합니다 “ 됐고 나도 조만간 벼슬에 나가게 될 거니 신경 쓰지 마쇼”
공자도 자존심 있지 권력욕심 때문에 주인을 계환자를 감금하고 그 자리를 꿰차는 하극상이나 하는 놈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지를 밝힌 것 입니다. 사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인의(仁)을 펼쳐 옛 주나라 서주 시대 주례의 격에 맞는 예악이 바로선 이상 사회를 펼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예악이 붕괴되고 사라진 현실에서는 정치에 나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양호의 하극상 과정과 그런 것이 싫어 벼슬을 마다하고 가르침에 열중하는 공자 이야기)

계환자가 총애하던 가신 중에 중양회(仲梁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호와는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래서 양호가 중양회를 쫓아내려 하자 공산불뉴(公山不狃:계손씨 종읍 비읍의 읍재)가 말렸다. 그해 가을 중양회가 더욱 교만해지자 양호가 그를 붙잡아 가두어버립니다. 이때 계환자가 화가나서 양호를 찾아가 중양회를 풀어달라고 하자 양호는 오히려 계환자까지 감옥에 가둔 다음 자기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하게 한 후에 석방합니다. 이 후로 계손씨 가신 이었던 양호는 오히려 계손씨 종족들을 더욱 우습게 보게 됩니다. 그 계손씨들 역시 노나라 공실보다 더욱 큰 권력을 행사하며 노나라의 국권을 좌지우지 합니다. 결국 노나라는 대부와 그 가신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분수와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 직분을 넘어서서 정도를 벗어나게 되었죠. 말하자면 위아래도 없이 무질서한 권력 체계로 빠져든 것이죠. 군대로 말하면 하극상, 권력으로 말하면 월권행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지켜보던 공자는 모든 벼슬을 내려 놓고 다시는 노나라에서 관직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집에 칩거하며 『시(詩)』, 『서(書)』, 『예(禮)』, 『악(樂)』과 같은 경전을 정리하고 연구하는데 온 힘을 쏟습니다. 이때 공자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찾아와 날이 갈수록 늘어나게 됩니다.
행단강학(은행나무 아래서 교육)

-. 못된 양호의 제안은 거절한 공자가 공산불뉴의 제안에는 혹해서 노나라 비성에서 이상 정치를 해보려는 공자의 속내 이야기

노정공 8년 (기원전 502년) 공자가 49세 되는 해 입니다. 계손씨 아래서 비성의 읍재를 하던 공산불뉴(公山不狃)가 대부 계환자로부터 대우 받지 못하자 양호의 세를 이용하여 란을 일으켜 계손씨, 맹손씨, 숙손씨 삼환씨의 적자들을 모두 죽이고, 대신 평소에 양호와 사이가 좋았던 삼환씨의 서자들을 세우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계환자가 반란한 가신에게 붙잡혔지만 계환자는 양호를 속여 간신히 탈출합니다. 그리고 계손씨를 중심으로 삼환씨가 힘을 합쳐 양호와 공손불뉴를 공격해 그 다음해 반란자과 싸워 승리 합니다. 결국 싸움에 패한 양호는 제나라로 달아 납니다. 이때가 공자의 나이 50세 였습니다. 공자는 ‘五十而知天命’이라며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공산불뉴가 계손씨에 반기를 들려 할 때 공자와 공산불뉴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를 좀더 해보겠습니다.)  

공산불뉴가 계손씨의 비읍(鄪邑 비성)을 점거하고 계손씨에 반기를 들고서 자기 세력을 과시하려고 자기 사람을 보내 공자를 찾았다. 공자는 그 때 예악을 통한 통치를 추구한지 오래 되었지만, 그 통치 이념을 시험해 볼 곳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기용해 주는 군주도 없어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때마침 공산불뉴의 초빙을 받은 공자가 수긍하는 식의 말을 합니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豊)과 호(鎬)와 같은 작은 땅에서 일어나 주나라 왕업을 일으킬 수 있었는데 지금 비성이 비록 작으만 풍과 호처럼 정도는 되지 않는가?」 한마디로 초대하면 하겠다는 거죠.
공자가 공산불뉴의 부름을 받고 비성으로 가려고 하자 자로(子路)가 얼굴을 찡그리며 공자를 못 가게 말립니다. “스승님 공산불뉴 같이 하극상을 저지르는 사람을 왜 찾아 가려 합니까?”냐는 거죠. 그러자 미련이 남았는지 공자는 자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공산불뉴가 나를 찾는 일이 헛된 것은 아니다. 그가 나를 불러 등용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동쪽의 옛 서주 같은 훌륭한 나라를 비읍에 세울 수 있을 것인데...」 라며 공자 자신이 등용되지 못함을 아쉬워 합니다. “뽑아만 줘봐 내 아주 잘 해낼 자신이 있으니까!” 뭐 이런 자신감을 표한 것이죠.
그러나 결국, 공자는 공산불뉴에게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드디어 노나라 제후 정공에 의해서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공자 이야기)

얼마 후에 노정공은 공자를 중도(中都 산동성 양산현(梁山縣) 동남)의 읍재(邑宰)로 임명했다. 공자가 중도의 읍재가 된지 일 년이 되자 사방의 제후들이 공자의 통치 방법을 따랐다.
이때 공자가 중도를 통치하며 백성들의 잘못을 형벌로만 다루면 형벌이 두려워 피하려고만 할뿐 잘못 한 것에 대한 반성이나 수치심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잘 못한 이들이 마음으로 반성하고 복종할 수 있도록 통치해야 한다는 방식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공자는 (지방 행정관) 중도의 읍재상에서 도성으로 불려와 승진해서 (중앙정부 행정장관) 사공(司空:건설부장관)이 되었고 다시 사공에서 소사구(법무차관)에 오릅니다. 정공 10년 기원전 500년은 공자의 나이 52세 때다. 그뒤로 55세 때에는 대사구(大司寇:법무장관)까지 오릅니다.

(공자가 정공과 함께 제나라 경공을 만나 위험에 대처하고 빼앗긴 노나라 땅을 되 찾은 협곡회맹 이야기)

기원전 500년에 노나라와 제나라는 평화 조약를 맺습니다. 하지만 제나라 대부인 여서(黎鉏)가 제나라 경공에게 노나라 공자에 대해 이렇게 간언합니다.
「노나라가 공자를 임용해서 국정을 맡기면 노나라는 대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제나라가 위태롭게 됩니다.」 이 때도 이웃나라가 잘나가면 않되는 것은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네요.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 보다 잘나가면 않되는 것 처럼 ㅋ~~
그래서 제나라는 사자를 노나라에 보내 협곡(夾谷)에서 만나 회맹을 열고 우호관계를 수립하자고 제안하고는 그 곳에서 노나라 정공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노나라를 침략하려는 음모를 세웁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노정공은 아무 대비도 없이 제나라와 평화를 위해 회맹에 참석하려고 합니다. 이때 공자가 회맹 의식을 주재하는 상례(相禮)의 일을 대신 맡겠다고 자청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신이 알기로는 외교적 일(문사:文事)에는 반드시 군사적(무:武) 대비를 갖추어야 하며 군사적 일(무사:武事)에는 반드시 외교적(문:文) 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제후들이 강역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문무 관리들을 대동했다 했습니다. 청컨대, 좌우 사마(司馬)를 데리고 가십시오.」
정공이 공자의 말을 따라 좌우사마를 대동하고 회맹장으로 출발하여 협곡에서 제경공을 만났다. 제사를 올릴 제단과 그 곳을 오르기 위한 세계의 흙 계단이 완성되자 두 군주가 서로 회동하여 상견례를 간략하게 행한 다음, 두 손을 높이 들어 서로 앞서기를 양보하면서 제단으로 올랐다. 두 군주가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예가 끝나자 제나라의 관리가 앞으로 달려와 말했다.
「이족(夷族:오랑케 족)의 춤과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옵소서.」
경공이 허락하자 일단의 이족들이 머리에는 꿩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몸에는 가죽옷을 입고, 손에는 각각 모(矛), 극(戟) 및 칼과 방패 등의 무기를 들고, 북소리를 울리며 요란한 모습으로 제단 위로 몸을 솟구쳐 올라왔다. 이때 낌새를 눈치를 챈 공자가 재빨리 앞으로 나와 성큼성큼 한 계단씩 계단을 오르는데(예법에 어긋난 걸음 상황의 급박함을 의미) 마지막 한 계단은 오르지 않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소리쳤다.
「두 나라의 군주께서 우호를 맺기 위해 만나시는 자리에 이적(夷狄:야만족)의 춤과 노래가 어찌하여 연주되는가? 청컨대 관리들을 시켜 물러나게 하시기 바랍니다!」
제나라의 관리들의 나아가 이적의 무리들을 물러가게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나라의 수행원들이 제경공과 재상 안영의 눈치를 살폈다. 제경공이 마음속으로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팔을 휘둘러 이족의 무리들을 물러나게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자 제나라 관리들이 다시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경공이 허락하자 광대와 난쟁이가 재주를 부리면서 앞으로 나왔다. 이번에 두 번째로 공자가 다시 황급하게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마지막 계단은 오르지 않고 소리쳐 말했다.
「일반 평민이 제후들을 희롱하는 자는 그 목을 베야 합니다. 관리들에게 명을 내려 처단해주십시오.」
회담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고 긴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제나라의 관리들이 결국 군주를 모독한 모독법 죄를 적용하여 그들을 요참형(腰斬刑)에 처했다. 경공이 공자의 당당한 행동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도의를 앎에 있어서 공자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돌아와 자기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노나라의 신하들은 군자의 도로써 자기 군주를 보필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한낱 오랑캐(이적:夷狄)의 도로써 나를 이끌어 그 결과 나는 노나라 군주에게 죄를 얻게 되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공의 이 노여움에 제나라의 한 관리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군자는 잘못을 저지르면 물질로써 그 잘못을 사과하고, 소인은 말로서 한다 했습니다. 주군께서 진정으로
잘못을 사과하실 생각이시라면 물질로써 하십시오.」
(小人之其過, 謝之以文, 君子之其過, 謝之以質 : 소인지기과 사지이문, 군자이기과 사지이질) 소인배는 말로만 사과하고 군자는 예물로써 한다. 말뿐인 사과, 일본은 2차 세계 대전 전범국 입니다 잘 못을 하고도 물질은 커녕 말로도 하지 안고 숨기고 부인하는 것은 소인 만도 못한 국가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제경공은 옛날 노나라에서 빼앗은 운(鄆: 운땅은 노나라 영토였으나 기원전 516년 제경공이 빼앗아 제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노소공(魯昭公)에게 주어 살게 했다. 노소공은 제경공이 자기를 신하로 취급하자 운 땅에서 당진의 건후(乾侯) 땅으로 옮겨 살았다. 이후로 운성(鄆城)은 제나라 땅이 되었다가 기원전 500년 제경공과 노정공이 협곡산(俠谷山)에서 회맹하고 맺은 수호조약에 따라 환(讙) 및 구음(龜陰)과 함께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이것은 회맹에 참석했던 공자의 활약 덕분이다.) 문양(汶陽:태산 지금 태안시 근처), 귀음(龜陰: 지금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동북)등의 땅을 다시 돌려주고 제나라의 잘못을 사과했다. 이때 돌려준 땅 면적은 제주도 두배의 크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때가 노정공 10년 (기원전 5000년) 공자 나이 52세 때 일입니다. 이런 공로로 공자는 대사구가 되었습니다.

(노나라 바로 세우기 작업 : 노나라 농단 세력 삼환씨 제압 이야기)

같은 해 공자가 정공(定公)에게 말했다.
「주나라 예법에 따르면 신하된 자로써 무기를 갖고 있으면 안되며, 대부되는 자로써 자기 성벽을 100치(雉2.25미터라면 둘레가 670여 미터에 해당)이상 쌓으면 안됩니다. 」
이에 공자는 그의 제자 중유(仲由, 자로)를 계손씨들의 가신으로 보내어 삼가(계손, 맹손, 숙손)의  봉읍인 비읍(費邑 : 산동성 비현(費縣)), 성읍(郕邑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동북), 후읍(郈邑 산동성 동평현(東平縣))의 성곽을 허물려고 하였다. 숙손씨들의 봉읍인 후읍의 성곽을 먼저 허물었고 이어서 계손씨들의 봉읍인 비읍(費邑)의 성곽을 허물려고 하자 당시 읍재(邑宰)인 공산불뉴(公山不狃)와 숙손첩(叔孫輒)이 비읍의 군사들을 이끌고 노나라 수도 곡부(曲阜)를 공격했다. 정공(定公)과 삼가(三家)의 종주들은 계손씨들의 궁에 있던 계무자의 누대(武子臺)에 올라 몸을 피했다. 비읍의 군사들이 공격하였으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이기지는 못하고 공실의 군사들 뒤를 따라 정공이 피신해 있던 무자대 밑에까지 들어왔다. 공자가 좌우사마인 신구수(申句須)와 락기(樂頎)에게 명해 비읍 군사들을 공격하게 했다. 비읍의 군사들이 싸움에 져서 도망치자 노나라 사람들의 뒤를 추격하여 그들을 고멸(姑蔑:산동성 사수현)성에서 격파했다. 공산불뉴와 숙손첩 두 사람은 도망쳐 제나라로 망명했다. 그 뒤 공실의 군사들은 비읍의 성곽을 허물었다. 이어서 맹손씨의 성읍(郕邑) 성곽도 허물려고 하자 성읍의 읍재(邑宰)였던 공렴처보(公斂處父)가 종주 맹손씨에게 말했다.
「성읍의 성곽을 허물게 되면 필시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제나라 군사들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맹손씨의 보루인 이곳 성읍이 없어지면 맹손씨들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차마 저의 손으로 손수 성읍의 성곽을 허물지 못하겠습니다.」
결국 정공이 공실의 군사를 보내 성읍을 공격하게 했지만 끝내 이기지 못했고 성읍은 허물지 못하게 됩니다. 실제로 지도로 보면 성읍은 제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요.
아무튼 노나라 대부인 세성씨가 공실을 농락해서 노나라 제후의 힘이 땅에 떨어졌던 것을 다시 바로 세우는 일을 공자가 이뤄 냈다는 것이죠. 군군신신부부자자를 이룬거죠

(노나라 정치에서 성과를 이뤄낸 공자. 이제 어깨가 슬슬 올라 가기 시작하나?)

노정공 14년 기원전 496년은 공자의 나이 56세 때이다. 공자가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노나라의 재상 일까지 대리하게 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자 제자들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합니다.
「군자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좋은 일이 생겨도 얼굴에 즐거운 기색을 띄우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공자가 뜨끔 했는지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들의 말이 맞다. 그러나 ‘귀한 사람은 그 지위에 맞게 일 처리하고 아랫사람에게 배우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 말은 절반은 공자 답지 않은 가식적 표현이고 절반은 공자 스스로 지위와 업적에 만족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공자는 노나라의 정치를 문란하게 한 소정묘(少正卯)라는 대부를 죽였다.
당시 소정묘는 다섯가지 못된 짓을 했다는 죄를 물어 공자가 사형 집행을 한 것 입니다.

(소정묘의 다섯가지 죄목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상세히 밝혀두고 있다)

一曰心逆而險(일왈심역이험)  
첫째 마음을 거스리고 험하게 행동하는 것 (겉으로는 상냥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자)
二曰行僻而堅(이왈행피이견)  
둘째 행실이 괴팍하고 고집만 부리는 것 (도량도 없고 포용성도 없이 타인을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
三曰言僞而辯(삼왈언위이변)   
셋째 거짓말을 하고 변론을 잘하는 것 (말을 그럴 듯 한데 모두 거짓인 사람)
四曰記丑而博(사왈기축이박)   
넷째 추한 것만 기억하고 넓게 아는 것 (아는 것은 많아 보이는데 죄다 영양가 없는 것)
丑謂非義五曰順非而澤(축위비의오왈순비이택)
다섯째 그릇된 일만 따르면서 이를 은덕으로 여기는 것 (잘 못을 알면서도 부화 뇌동 하는 인간)
此五者有一于人(차오자유일우인)
사람으로서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만 범하는 것이 있어도,
則不免君子之誅(즉불면군자지주)     
군자로서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공자도 권력을 얻자 잘 해 보겠다는 의욕으로소정묘를 대상으로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 같아요. 이 일은 훗날 공자에게 오점으로 남는 사건이 됩니다. 인의를 추구한 사람이 사형 선고를 내린 일 이니까요…
아무튼 이런 일이 있고 공자가 노나라의 국정을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물먹여 도축해 팔던 장사군들이 값을 속이지 않게 되었고 남녀가 길을 걸을 때 떨어져 걷게 되었으며,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사방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관리를 찾아가 여행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모두 대접을 잘해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노나라가 잘 나가면 안 되는 제나라의 방해 공작 이야기)

제나라 사람들이 엉망이던 노나라가 이제 정상을 찾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소문이 돕니다.
「노나라에서 공자가 정치를 맡았으니 노나라는 장차 패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제나라는 오히려 노나라에 흡수 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두고 볼 것이 아니라 제나라 땅을 떼어 미리 바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 소문에 제나라 대부 여서(黎鉏)가 제후(齊侯) 경공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노나라에 땅을 떼어주기 전에 먼저 시험 삼아 노나라의 정치를 방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노나라가 선정을 행한다면 그때 가서 땅을 떼어 바친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나라안의 미녀 80명을 뽑아 이쁜 옷을 입혀 춤을 가르쳐서 무늬가 있는 말 120필이 끄는 30대의 수레에 태워 노나라에 보냅니다. 제나라 사자가 여자 무희와 아름다운 말들을 곡부성 남문의 높은 곳에 진열시켰놓자 노나라 계환자가 미복 차림으로 아무도 몰르게 그곳에 세 번이나 가서 구경하고 나서 미녀와 말들을 받아드리기 위해 노후(魯侯) 정공과 함께 지방을 순시한다고 하고는, 남문으로 가서 하루 종일 여자들의 가무를 구경하고 정사를 게을리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광경을 공자 제자 자로가 보고 공자를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아무래도 스승님께서 이제 노나라를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가 아직 노나라에 미련이 남았는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번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교제(郊祭) 때, 노후께서 만약 제사를 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내가 노나라를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아직 노나라 정공에게 필요한 인물 즉 인정 받는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려보자는 생각이었던 거죠.
결국 계환자는 제나라에서 보내온 여자 무희들을 받아들여 노후와 함께 그녀들이 추는 춤을 구경하느라 3일 동안을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후는 제사를 지내고도 제사 음식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제사 음식을 나누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데도 이를 실행하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기로 결심 합니다. 이상 정치고 뭐고 이제 노나라는 구제 불능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포기한 것 입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를 찾아보자 이거죠. (직장인 분들 중 이런 분들 있죠 “아~~이제 이 회사는 글렀어 오너 포함 경영진이 다 썩었어…차라리 경쟁사로 튈까? 경쟁사로 가면 나 정도 실력이면 받아 주겠지?” 뭐 이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며 던진 사직서에 쓰여진 사직 사유)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가다가 둔(屯 관도현(館陶縣))이라는 곳에 묵게 되었다. 노나라의 태사(太師) 기(己)가 공자를 배웅하면서 묻습니다.
「선생께서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어째서 떠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내가 노래를 한 곡 불러도 되겠는가?」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 공자 노래를 듣고 노나라로 돌아간 태사 기에게 계환자가 물었다.
「공자가 위나라로 가면서 뭐라고 합디까?」
태사가 공자가 부른 노래를 계환자에게 그대로 전하자 계환자가 듣고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공자가 제나라 무희를 받아들인 나를 비난하고 있구나!」
계환자도 공자가 떠난 이유를 알긴 알었던 거죠


지금까지 공자의 일생 중에 가장 핫했던 40대 50대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
저의 구독자 대다수가 4,5,60대 분들이 많습니다. 사오정 오륙도  
나온 김에 현실의 어려움을 뜻하는 단축어 몇개 소개 할께요
십장생   10대도 장차 백수
이태백   20대 태반이 백수
삼팔선/삼팔육  38세까지 다니면 선방
사오정   45세가 정년
오륙도   56세까지 일하면 도둑 심보

(다음회)

(공자 세가 3부 : 춘추여러 제후국 유세를 떠나는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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